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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단 May 03. 2024

baby one more time

아무 일정이 없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팬케익을 먹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30분도 되지 않아 준비를 마치고 지하철에 올라 휴대폰을 보니 오늘 뭐하냐는 친구의 연락이 와 있었다. 팬케익을 먹으러 간다고 하니 자기도 가겠다는 친구의 답장에 식당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답했다. 생각지 못한 행운에 마음이 들떴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하철에서 내려 식당으로 향했다.


항상 인기가 많아 줄을 서야 하는 맛집은 오늘도 한 시간 정도 대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직 이른 아침임에도 봄의 햇살은 따스하게 자리를 비추고 있었다. 기분 좋은 느긋함으로 책을 읽다 보니 어느덧 가게 바로 앞에 있는 벤치까지 자리가 앞당겨졌다. 자리를 옮기며 함께 벤치에 앉은 앞사람에게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구글 번역기를 켜 메뉴판 사진을 찍고 있는 그녀는 외국인이었다. 여러 차례 휴대폰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메뉴를 살피는 모습에서 이 식당을 방문한 건 오늘이 처음임을 알 수 있었다. 같은 이유로 한 벤치에 함께 앉아 있는 동료 손님에게 반가움을 느꼈고, 오랜 단골로서 베스트셀러 메뉴를 추천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번역기를 확인하고 휴대폰을 내려 놓았을 때, 나는 말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따듯한 바람이 살랑이는 야외에서 이국적인 얼굴의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건, 밀폐된 버스에서 비슷한 얼굴을 한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혼자 왔어요?”라고 영어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상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다음 이어진 말은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혹시 너도 혼자 왔으면 나랑 합석해도 좋아. 손님이 많고 대기가 기니까 같이 들어가자” 예상치 못한 적극적인 제안에 나는 당황했다. 내가 뱉은 다음 말도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I’m waiting for my friend.” 나는 딱 잘라 일행이 있다고,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고 대답했다. 상대는 알겠다고 대답한 후 고개를 돌려버렸고, 우리의 아주 짧은 대화도 그렇게 끝이 났다.


같은 식당을 찾은 기대감을 나누고 맛있는 메뉴를 추천하고 싶었던 나의 의도는 마침표와 함께 증발해 버렸다. 시간을 되돌려 다른 답을 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다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는 모습을 보며 힘없이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같은 벤치에 앉아 서로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메뉴판을 꼼꼼히 살피는 낯선 이에게 나는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 실패한 마당에 –그것도 내가 망쳐버렸다!- 아무렇지 않게 다시 말을 걸 뻔뻔함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후회와 민망함이 버무려져 느긋했던 웨이팅은 한 순간 안절부절 못하는 시간으로 변했다. 가게 안에 있는 손님이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 그녀가 입장할 차례였다. 그럼 나에게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으리라. 나는 죄인처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여전히 메뉴판을 뚫어질 듯 쳐다보는 낯선 이에게 눈빛을 보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는 메시지를 담아 무해하고도 다정한 눈빛을 만들어 보이면서. 한 시간 같은 몇 분이 흐르고, 내 눈빛을 의식했는지 그녀가 이어폰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예 가방에 정리한 이어폰을 집어넣는 모습이 꼭 나에게 ‘한 번 더 해 봐’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다시 용기를 냈다. 이번엔 망치지 않으리라.


“뭐 먹을지 정했어요?” 5분 전의 냉담한 합석 거절을 무마하려 다정함을 쥐어짠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다시 만난 그녀는 처음과 다르지 않게 눈을 마주치며 “뭐가 맛있나요?”라고 되물어 왔다. 나는 그녀 가까이 몸을 당겨 앉으며 메뉴판을 가리켜 좋아하는 메뉴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성공이었다. 우리는 어느새 나란히 붙어 앉아있었다. 두 사람을 같은 장소로 이끈 팬케익 두 조각이 대화의 공간을 만들고, 길을 터주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우리 두 사람의 시간이었다.


서로의 나이를 물으며 시작한 스몰토크는 직업과 여행 목적, 나라 간 문화 차이, 두 나라가 경험한 전쟁, 각 나라의 교육열 비교로 무궁무진하게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그녀가 자신의 국적을 말할 때였다. 어느 나라에서 왔냐는 질문에 “러시아”라고 답하면서 “unfortunately”라고 덧붙이는 그녀의 표정에서 나는 수치심을 읽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으로 세계가 시끄럽던 시기였다. 며칠 전 국립 중앙 박물관에 다녀왔다는 여행자는 한국 전쟁과 관련된 유물을 보며 자신의 나라가 저지르고 있는 전쟁의 폭력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고 이야기했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소통하며 작고 큰 균열이 생겼기에 모든 말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녀가 전쟁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교육계에 종사하는 나의 직업을 듣고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고등학교 과학 교사인 어머니를 둔 그녀는 어린 시절 엄한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교육열이 강한 집안에서 보낸 나의 어린 시절이 그녀의 어린 시절과 맞닿았다. 학교에 대한 이야기는 학창시절의 추억으로, 좋아하던 과목은 지금의 전공으로, 갖게 된 직업과 현재의 삶으로 한 땀 한 땀 이어졌다. 그 대화 속에서, 우리의 세계는 불규칙한 박자로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거리를 좁혀갔다. 닮은 곳 하나 없는 두 얼굴 위로 꼭 닮은 미소가 떠올랐다. 사장님이 자리를 안내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을 때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빠른 속도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두 사람을 함께 들여보내야 할지 한 사람에게만 자리를 안내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사장님을 보며 우리는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했다. 다시 시계를 봤을 때 시간은 30분이 훌쩍 흘러 있었다.


일행이 모두 도착해야 입장할 수 있기에, 나는 몇몇 손님이 나오고 나서도 벤치에 앉아 자리를 지켜야 했다. 얼마 후 친구가 도착했다. 흥분과 감격에 찬 목소리로 방금 일어난 일을 말해주자 친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나의 대화파트너가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그녀는 가게 문을 열고 나와 뒤를 돌더니 아직 벤치에 앉아있는 나를 향해 걸어왔다. “추천해 준 음식 너무 맛있었어! 진짜 배불러!” 기분 좋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맛있게 먹어서 다행이라는 말과 고맙다는 말, 좋은 하루 보내라는 인사를 서로 주고받은 후에야 그녀는 뒤를 돌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가볍게 걸음을 옮기는 그녀는 나에게 더이상 ‘외국인 관광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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