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여름, 귀를 찌르는 반대 시위의 소음과 콧등을 스치는 사람들의 땀냄새를 뚫고 나는 시청역의 출구로 나섰다. 경찰의 안내에 따라 횡단보도를 건너 서울 광장의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가슴을 옥죄는 떨림과 가슴을 트이는 해방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광장을 채운 신나는 음악과 형형색색의 부스, 나와 같은 설렘과 흥분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한 가지를 위해 모여 있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의 연대”. 나는 서울퀴어문화축제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코로나 이후 몇 년 만에 다시 열리는 퀴어문화축제는 수많은 반대를 맞이했다. 정당한 방식으로 서울 광장 사용 신청을 했음에도 수많은 민원으로 인해 반려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고, 이에 대항하여 시민들이 72시간씩 끊어지지 않는 릴레이 줄 서기를 하는 등의 노력이 이어졌다. 지난한 과정을 거친 후 힘겹게 열린 축제임을 알았기에, 그 해의 축제는 내게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내가 느끼는 설렘과 떨림 사이에는 결연함이 스며 있었다. 축제가 열리기 전날 밤, 나는 몇 주 전에 미리 사둔 무지개 스타킹을 현관 앞에 고이 준비해 놓고 잠들었다.
축제 당일, 시청역을 나서자마자 반대 시위의 모습이 보였다. 한복을 입고 춤을 추며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외치는 사람들, 예수의 모습을 흉내 낸 남성이 거대한 십자가를 들고 호소하는 모습, 귀를 때리듯이 큰 소리로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가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이 압도적인 광경을 무력화하는 것은 광장 안을 채운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광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나는 그들에게 막연하고도 끈끈한 연결감을 느꼈고, 그것은 나를 이 모든 소란으로부터 지켜주고 있었다. 함께 웃고 노래 부르고, 춤추며 행진할 몇 시간 뒤의 모습이 무지갯빛으로 그려지는 듯했다. 나는 활짝 웃으며, 애인의 손을 잡고 광장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너무 오랜 ‘사회적 거리두기’ 탓이었을까? 광장에서 몇 시간이 흘렀지만 내가 상상했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쉽게 보이지 않았다. 함께 온 사람들은 그 일행들끼리, 커플은 커플끼리, 혼자 온 사람은 오롯이 혼자서. 모두가 분화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비슷한 나이대의 커플이 보일 때면 반갑게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어색하고도 묘하게 경직된 광장의 분위기는 나를 애인 곁에 가만히 묶어 두었다.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점점 이상하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힘들게 얻어낸 교류의 기회인데, 왜 아무도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을까?’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고 점점 기분이 처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이 모인 광장 속에서 나는 외로움을 느꼈다.
퀴어문화축제의 하이라이트는 행진이다. 깃발을 흔들고, 음악에 맞춰 춤추고, 함께 걷는 행진 속에서라면 내가 느낀 이 긴장감이 조금은 풀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그런데 행진을 위해 줄을 선 순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사람들은 각자의 우산 속으로 숨어들었고, 우리는 서로에게서 한 발씩 더 멀어졌다. 혼자 온 참가자가 우산을 가져오지 않아 비를 홀딱 맞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함께 우산을 쓰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행진이 시작되었다. 빗소리와 반대 시위의 소리에 묻혀 음악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고, 우산으로 시야가 가려져 서로의 모습을 보기도 어려웠다. 발랄하게 다리를 색칠했던 무지개 스타킹은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슬픔이 밀려왔다. 나는 행진을 반도 마치지 못한 채 대열에서 빠져나왔다.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숙소의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 같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 대학생이 부모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저 사람들이 레즈비언이야” 속삭임은 선명하게 귓가를 채웠다. 주인공이 되기를 기대하며 시작한 하루의 결말은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에는 신나는 파티도, 음주가무도 없었다. 나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참 하고 이불 안에 숨어들어 일찍 잠들었다. 다음 날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두 쌍의 퀴어 커플이 있었다. 미처 다 씻어내지 못한 타투 스티커의 흔적, 비를 맞으며 행진한 후의 꼬질꼬질함은 우리가 같은 하루를 보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제 비가 많이 와서 힘들었죠?”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고민하던 차에 우리는 1층에 도착했고 당연하게도 남처럼 각자 갈 길을 향해 걸어갔다.
그날은 무척 실망스럽고도 슬픈 날이었다. 하지만 그 슬픔은 좋은 것이었다. 나에게 숙제를 안겨줬기 때문이다. 축제 날을 되돌아볼 때마다 나는 낯선 사람에게 눈인사 한 번 건네지 못하고 우산 한 번 기울이지 못한 스스로가 너무 실망스러웠다. 동시에 그런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나 자신이 의아하기도 했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나의 감정은 이해의 영역이 아닌 탐구와 개척의 대상이었다. “낯선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말 걸고, 연대의 공기를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그날의 슬픔이 나에게 부여한 숙제였다. 나는 착실하게 숙제를 하고, 스스로를 단련시켜 다음 축제 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참여하겠노라 다짐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방법을 찾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