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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단 Apr 26. 2024

색 조합이 너무 멋져요

슬픔이 안겨 준 숙제는 무거운 마음의 짐이 되었다. 뜨거운 여름 날씨는 많은 것을 바싹 말려 가볍게 만들어 주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물 먹은 솜처럼 축축한 상태였다. 좋아하는 곳에 가면 마음이 환기될까 하는 기대에 오랜만에 독립서점을 찾았다. 천천히 둘러보던 중, 나는 구석에 꽂힌 한 권의 책을 만나게 된다. 쪼그려 앉아 몸을 숙여야만 보이는 곳에서 그 책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면>. 책의 제목이었다.


‘The power of Stranger’이라는 원제의 책은 미국의 저널리스트가 쓴 책으로, 넓은 범위와 다양한 층위에서 낯선 이가 갖는 힘에 대해 다룬다. 인류 발전의 역사와 진화 과정부터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한 여자의 이야기까지. 책은 역사와 과학, 인류학과 심리학의 경계를 넘나들고 미국과 영국의 각지를 오가며 하나의 큰 줄기로 이어진다. “낯선 사람과의 교류가 사회적 안녕감을 높인다”는 것이었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그의 복잡성과 삶의 맥락을 헤아릴 수 있다. 이는 나와 함께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고, 궁극적으로 개인의 사회적 안녕감을 증대시킨다는 것이 책의 내용이었다. 책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나는 축제에서 느꼈던 어색함과 답답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생판 남에게 말을 걸고 싶었던 것은 내가 사람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생긴 일이 아니었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고 연결되고자 하는 건 인류의 본능적인 욕구였던 것이다. 책장은 무서운 속도로 넘어갔고, 나는 숙제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생각에 희열을 느꼈다. 책을 품에 끼고 다닌 지 사흘 만에 나에게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는 인류 진화 과정에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있었다. 서로 말을 걸지 않고 각자의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은 더 이상 일상이 아니었으며, 내 눈에 그 모습은 인류의 본능을 거스르는 부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비치고 있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읽을 즈음이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한 사람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쨍한 푸른색 바지에 맑은 초록빛 니트를 입은 멋쟁이 아주머니였다. 그 순간 하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분에게 말을 걸어야 해”. 하지만 25년간 반복 학습으로 체득한 타인에 대한 경계는 고작 책 한 권으로 쉬이 깨뜨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와 나는 일면식도 없는 ‘남’이라는 생각은 숙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도전 의식과 강하게 맞붙었다. 입을 여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적절한 타이밍과 문장을 고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앉아있는 아주머니를 앞에 두고 서서 말을 걸면 가둬두고 억지로 말을 시키는 폭력적인 상황으로 이어질 것 같았다. 나는 상대가 불편하다면 언제든 자리를 피할 수 있게 열린 상황에서 말을 걸고 싶었다. 대사는 또 어떤가. 어떻게 말해야 평가가 아닌 감탄으로 전해질지, 부담스럽지 않고 산뜻하게 마음을 전할 수 있을지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수많은 고민이 실뭉치처럼 엉켰고, 나는 어디서부터 실을 풀어야 할지 모른 채 그저 실뭉치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종로에서 홍대로 향하는 271번 버스 안에서, 평온하게 앉아있는 낯선 아주머니를 두고 나는 혼자만의 싸움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 노려보던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고 아주머니를 힐끗 쳐다봤다. 혹여나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칠까 급히 눈길을 돌렸다. 이번에는 버스를 둘러봤다. 모두가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휴대폰을 만지는 사람과 음악을 듣는 사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채워진 버스는 조용했다. 안내 방송과 문 여닫히는 소리만이 버스 안에 울려 퍼졌다. 오후 3시, 나른하게 흔들리는 차체 안에서 나는 다시 한번 서울광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의 슬픔이 희미하게 만져지는 듯했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책에 밑줄 친 문장들을 복기했다.


바로 그때, 멋쟁이 아주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부담스러우면 어떡하지?’,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면 어떡하지?’ ‘유난 떨지 말고 그냥 폰이나 볼까?’ 부산스럽던 생각들이 순간 모두 멈췄다. 하차를 위해 뒷문 앞으로 이동한 아주머니는 어느새 내 옆에, 나와 같은 눈높이로 서 있었다. 아주머니를 바라보는 순간,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스타일이 너무 좋으세요. 색 조합이 멋져서 저도 모르게 눈길을 자꾸 뺏겼어요.”

귓가에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목소리였다.

“어머, 감사합니다”

당황한 기색의 목소리가 쑥스러움을 품고 화답했다.

“삐익-”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뒷문이 열리고 아주머니는 그대로 버스에서 걸어 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낯선 사람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는 사실에 흥분이 숨겨지지 않았다. 조금 전 아주머니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아 무심코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는 멋쟁이 아주머니가 있었다. 선글라스를 이마 위로 올려 쓰고 큰 보폭으로 걷는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나는 슈퍼모델을 보았다. 쑥스러움이 달아난 자리를 기쁨이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버스는 느리게 다시 출발했다. 아주머니의 모습이 작은 점이 될 때까지 나는 계속 바라봤다. 안개처럼 낀 구름 사이로 밝은 여름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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