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하는 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육하원칙에 따라 조리 있게 말해라.”
저녁을 먹으며 들뜬 목소리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던 중이었다. 아빠의 차가운 말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즐거움을 위한 말하기는 순식간에 잘 해내야 하는 과제가 되었고, 몸에는 긴장감이 확 돌았다. 하지만 아빠의 냉정한 평가도 말하기를 향한 내 열정을 막을 수는 없다. 나는 머릿속으로 육하원칙을 따져가며 말을 고른다. 마침내 준비가 되었을 때, 나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식탁을 가로지른다. “오늘 2교시에 학교에서/친구가 나에게/같이 놀고 싶으니/학교 마치고 만나자고 했어요.” 언제, 어디서/누가/왜/무엇을/어떻게. 나는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빠진 내용이 없음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아빠가 아무 말 않는 것은 말을 이어가도 된다는 신호다. 나는 “육하원칙”을 머리로 되뇌이며 쉴 새 없이 떠든다. 초등학교 2학년, 9살 때의 일이었다.
말에 대한 열정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갔다. 머리가 굵어지고 무언가가 채워졌다는 느낌이 든 순간부터, 나는 쉬지 않고 그것들을 쏟아냈다. 말은 대부분 나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용 받지 못하는 말하기가 얼마나 외로운지 뼈저리게 알았기에, 매력적인 말하기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그놈의 육하원칙과 적절한 유머 포인트, 과장된 연기와 긴장감의 활용... 이런 기술이 날로 늘어 갔다. 입을 떼면 친구들이 모여들었고 제각각이었던 표정이 닮아있는 하나의 얼굴로 바뀌어 갔다. “말 잘한다”는 말은 나를 꾸며주는 형용사가 되어, 나의 이야기를 밝게 비추어주었다. 말을 하고 있을 때 내 눈은 가장 빛났고, 나의 존재를 가장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의 말하기는 철저하게 나만을 바라보는, 맹목적 일인칭이었다.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은 외롭다. 말에 대한 열정은 이해받고 싶다는 욕망으로부터 출발했지만, 나만을 위한 말하기에 타인은 없었다. 일인칭의 세계에서는 주인공도, 각본가도, 연출가도 나여야만 하는 법. 아무도 끼어들 자리 없이 빡빡하게 진행되는 원맨쇼 뒤에는 늘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십 수년간 이어져 온 쇼의 레퍼토리는 굳게 닫힌 문이 되어 있었다. 그 문을 열고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었지만, 손잡이가 보이지 않았다.
대학교 3학년 겨울, 나는 인터넷에서 ‘한 해를 정리하는 좋은 대화’라는 제목의 글을 보게 되었다. ‘올해의 노래’, ‘올해의 슬픔’, ‘올해의 기쁨’ 등의 키워드를 갖고 번갈아 말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라는 제안이었다. 재미있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노트에 소재들을 메모했고, 그해 12월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듣기와 말하기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대화의 구성 덕분에, 우리는 서로를 알게 된 이래 최초로 비슷한 발언 시간을 나눠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듣는 역할은 손잡이가 되어 나를 돌이킬 수 없는 2인칭의 세계로 이끌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을 때, 나는 비로소 그를 만나게 되었다. 멀리서 바라보며 안다고 단정 지은 그의 단면 아래에는 내가 보지 못한 수많은 레이어가 있었다. 그것은 차곡차곡 쌓여 있기도, 복잡하게 엉켜있기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부러져 있기도 했다. 깍쟁이 여대생이라는 표면 아래에는 부모님의 교육열로 고통받았던 어린 시절이라는 레이어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부모님의 가치관을 내면화 해 상처 받으면서도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모순이 놓여 있었다. 누구보다 남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친구 안에는 여자 선배에게 반해 반년 동안 도시락 싸 들고 따라다닌 과거가 레이어로 놓여 있었으며, 자칭타칭 걱정 없는 부잣집 공주님에게는 6남매의 장녀로 집안의 정신적 기둥이 되어야 하는 부담과 난치병을 앓는 몸이라는 레이어가 깔려 있었다. 한 사람을 구성하는 여러 레이어를 보게 될 때마다 그를 새롭게 만나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일이었다.
말하기는 1인칭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자기중심적 행위이다. 반면, 말 걸기는 2인칭의 세상을 열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말하기는 말함으로써 완성되지만, 말 걸기는 들을 때 완성된다.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복잡한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은 내가 알던 말하기의 세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더 이상 말을 공허한 메아리의 재료로 쓰고 싶지 않았다. 서로의 레이어를 살피고, 진정으로 연결되는 다리로서 말을 하고 싶었다. 조심스레 ‘너를 알고 싶다’ 두드리는 손짓, 그렇게 나의 말은 말 걸기의 세계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