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나의 개방성을 과시하고 용이한 접근성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자주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 ‘이제 나는 갑자기 어딜 가든 온갖 사람이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됐어. 거리에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려고 날 멈춰 세운다니까. 심지어 헤드폰을 끼고 있을 때도 말이지.’ 예전에는 없던 일이라고 그가 말했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면>, 조 코헤인
정말 그럴까? 내향적인 성격의 저자는 다양한 말 걸기 경험을 통해 자신의 개방성과 접근성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으며, 그 후 사람들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일이 많아졌다고 했다. 정답지처럼 모시고 읽는 책이었지만, 이 대목을 읽을 때는 ‘미국인이라서 그런 거 아냐?’하는 의심이 들었다. 나의 말 걸기에 친구도 한 마디 얹었다. “절대 한국인을 과소평가하지 마. 한국인이 그런 걸 쉽게 받아들일 리 없어.”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를 행동강령으로 삼고 성실히 수행한 지 일 년쯤 되었을 때였다. 약속 장소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는데, 두 아주머니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핫스팟 켜는 방법을 물어보는 아주머니는 처음 보는 나에게 비밀번호까지 알려주며 휴대폰을 맡겼다. 문득, 이런 일이 너무나 일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사람이 먼저 말을 걸어온 일이 그 주에만 세 번째였던 것이다. ‘어쩌면 저자가 한 말이 진짜일지도 몰라’ 나는 생각했다.
남들이 나에게 말 거는 것을 의식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지하철역에서 여러 사람들을 지나쳐 보내다가 나를 붙잡아 길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다. 병원 대기 중 소파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감기예요?”라며 먼저 말을 걸어와 30분 넘게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고, 카페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무슨 책을 읽는지 물어보며 대화를 시작하는 사장님들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말 걸기를 하는 건 나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어쩌면 모두가 당연하게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뒤늦게 깨달은 내가 혼자 들떠서 말 걸기를 큰일로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며칠간 고민한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칼같이 딱 자른 대답이 돌아왔다. “나한텐 그런 일 일어난 적 단 한 번도 없어.” 몇 명에게 물어봐도 대답은 비슷했다. 가끔 길을 물어보는 사람이 있지만 대부분 종교 권유였다는 부연 설명이 덧붙여졌을 뿐. 말 걸기를 하다 보면 나의 개방성을 알아보고 사람들이 먼저 말을 걸어온다는 책의 내용은, 어느새 나의 현실이 되어 있었다.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레이어를 들여다 보는 일이다. 하지만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자신은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다’라는 신형철 평론가의 말과 같이, 우리는 타인의 복잡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의 단면을 전체라 생각하며 살아간다. 내 안에도 같은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양한 말 걸기의 경험은 내게 한 사람을 이루고 있는 레이어를 조금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주었고, 어느새 나의 말 걸기는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더이상 나만큼 복잡한 타인을 단지 세상의 부품이나 배경으로만 대하고 싶지 않았다. 업그레이드된 나의 말 걸기에는 낯선 이를 온전한 한 사람으로 대하겠다는 비장함이 스며 있었다.
이런 나의 변화는 더 이상 내면에만 머무를 수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밖으로 새어 나왔다. 새어 나온 것은 그들을 궁금해하는 나의 눈빛이었을 수도, 그들의 상황을 헤아리려 잠깐 멈추는 걸음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타인의 복잡성을 알아보고자 했던 나의 소망이 낯선 이를 통해 나에게 되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의 대사도 조명도 없는 엑스트라로 그쳤던 나의 일상 속 역할은 그들의 말 걸기를 통해 바뀌었다. 나는 더 이상 지하철 승객1, 병원 대기자4, 카페 손님2가 아닌 한 사람으로 그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복잡하고도 다이나믹한, 고유한 한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