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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단 Aug 23. 2024

큰 보폭으로 한 걸음

디와 조가 떠난 후, 쉴 새 없이 손님들이 찾아왔다. 호기심, 무료, 사이비가 아니라는 홍보문구 등 부스를 찾는 이유는 제각각이었고, 이유만큼이나 그들의 이야기도 다양했다. 최대한 일정하고 균일한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은 손님 한 명 한 명의 개별성 앞에서 무너졌다. 일정한 속도의 안내 멘트와 규격화된 대화 시나리오로는 그들을 만날 수 없었다. 나는 대화 판매원이라는 자리에서 내려와 한 사람으로서 손님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규칙이 사라지니 대화가 자연스러워졌다. 내가 할 일은 오직 하나였다. 내 앞의 뮤즈에게 귀를 기울이는 일. 어느새 대화는 즉흥연주인 '잼'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다. 손님에 따라 연주의 장르도 박자도 길이도 달라졌다. 모든 질문에 짧고 명료한 답을 하여 금방 대화를 마친 손님이 있는가하면 질문 뽑기를 마친 후에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 한참을 머물다 가는 손님도 있었다. 분노와 흥분을 거침 없이 표현하는 락 음악은 10여분 만에 감정을 낭독하는 잔잔한 첼로 독주로, 부드럽게 사랑을 노래하는 발라드로 장르를 바꿨다.


연말 분위기를 즐기려 플리마켓을 찾은 커플은 낯선 이와의 삼자대면을 통해 낯선 연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라서요...”라며 몇 분간 고민한 후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남자친구를 바라보는 여자친구의 눈빛에는 신기함이 깃들어 있었다. 낯선 이와의 느슨한 연대를 꿈꾸는 나의 이야기를 들은 여자친구는 봉인했던 공무원 자아를 소환하여 자신이 맡았던 공동체주택 설립에 대해 설명해 주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는 남자친구는 다시 한 번 연인에게 반한 듯 했다.


한참 주위를 맴돌다 조심스레 의자를 끌어 앉은 남자 손님은 나의 부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내 공간에 낯선 사람이 계속 들이닥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눠야 하는 건 공포 그 자체“라고 말하며 누군가는 그 일을 자의로, 심지어 즐겁게 한다는 게 놀라웠다고 했다. 하지만 대화가 이어지자 그는 그런 자신도 늘 타인이 궁금하다고 고백했다.


‘카뮈 덕후’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20대 초반의 손님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도 친구들과 다른 유년기를 보낸 탓에 공감할 수 있는 추억이 적어 외로움을 자주 느끼고,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독서모임을 찾아가도 자신과 같은 카뮈 팬들은 대체로 나이가 훨씬 많아 겉돌았다는 그녀는 가장 좋아하는 책의 제목처럼,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낯선 이와의 만남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이방인인 법. 이 곳은 마음껏 달라도 되는 공간이었다. 나는 그녀의 이방인이 되어, 그녀는 나의 이방인이 되어 우리는 외로움 없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피부와 딱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중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보자마자 단숨에 "딸과 아내의 건강"이라고 답했던 40대 직장인은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림이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을 말해주었다. 열아홉살부터 만화를 시작해 자기만의 만화를 그리겠다는 일념으로 10년간 만화 외길을 걸어왔다는 그는 “만화는 제 피부 같은 것”이라고 말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만화를 놓아주게 되었다고 했다. 회사원이 된 지금도 그림 그리는 일을 하고 있지만 더 이상 만화는 내 것이 아니라 느낀다는 그의 이야기는 그림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내 마음을 강하게 건드렸다.


나에게는 노래가 피부 같은 것이었다. 태권도장 코앞에 살면서도 관장님이 운전하는 봉고차 앞자리에 앉아 동네 한 바퀴를 돌고서야 집에 갔던 다섯 살의 나는 자동차에 달린 작은 티비 속 모든 노래를 외우고 있었고, 아홉 살에는 등산 중 노래자랑대회에서 1등을 하며 삼계탕 4인 식사권을 거며쥐기도 했다. 명절날 시골집 거실을 빼곡히 채우는 또래 사촌들 사이에서 내 이름 석자를 어른들에게 각인시키는 방법도, 학교에서 교감선생님이 간식을 사 들고 내가 있는 동아리실을 찾아오게 만드는 방법도, 대학에 진학한 후 인터넷에 나를 찾는 게시글이 올라오게 하는 방법도 모두 노래였다. 노래를 통해 나는 알아봐졌고, 기억되었으며, 존재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노래는 곧 나, 나는 곧 노래였다.


하지만 지금 이 곳에 앉아있는 나에게 그 모든 일은 과거형일 뿐이었다. 더 이상 노래는 내 피부도 존재도 아니었다. 자기소개서의 ‘특기‘란에 기재할 수 있는 소소한 재주이자, 가끔 낭만적인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치트키. 그게 다였다.


“피부에 앉은 딱지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것 같네요.”

누가 한 말인지 기억나지 않는 이 문장은 잠시간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내가 한 말인지, 그가 한 말인지 모를 이 말은 어쩌면 우리가 함께 한 말이 아니었을까.




대화를 파는 사람. 내 머리에서 나온 발상이었지만 자리에 앉는 그 순간까지도 어떤 방식으로 거래가 진행될 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연달아 손님을 맞이하다 보니 거래의 방식이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물건과 돈이라는 재화를 교환하는 마켓에서, 나는 시간과 경청, 그리고 이야기를 재화로 거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낯선 이가 가져다 주는 영감과 깨달음은 거래의 인센티브였다. 이 모든 것은 눈에 보이지도, 돈으로 환산될 수도 없지만 나에게는 무엇보다 값진 재화였다.


앞으로 나에게는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어떤 사람을, 어떤 이야기를, 어떤 세계를 만나게 될까? 포스터를 떼고 유리병을 정리하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졌다. 카페를 나서자마자 코끝에 닿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나는 생각했다. 무엇이든 좋다고. 2023년 12월 30일 저녁, 수많은 뮤즈와의 대화를 마친 나는 작년 여름 나에게 던져진 숙제에 큰 보폭으로 한 걸음 다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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