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명을 실은 ‘미동부 10일 패키지’ 버스는 캐나다 국경을 넘어 나이아가라 폭포로 향했다. 우리는 헬기를 타고, 빙빙 도는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나이아가라를 눈에 담았다. 지하 터널로 고속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 머리칼을 적시며 폭포의 허리를 온몸으로 느꼈고, 전 세계에서 모인 관광객들과 함께 유람선을 타고 비옷을 다 적실 정도의 폭포수를 맞으며 관광을 이어갔다. 정상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는 법. 나이아가라 폭포라는 대자연마저 지겨워질 때까지 관광을 하고 난 후 어른들은 모든 것에 감흥을 잃었다. 평화로운 캐나다의 자연은 더 이상 어떤 감동도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천 개가 넘는 섬을 둘러보는 배 위에서도, 퀘백의 도깨비 촬영지에서도 그들은 시큰둥함으로 일관했다. 무엇보다 그동안 축적한 농축된 피로가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대형버스 안에서 그들은 쿠션과 겉옷을 빌리고 빌려주며 어떻게 해야 더 편하게 잘 수 있을지 고민했고, 버스에서 내려 사진을 찍을 때면 다들 반쯤 넋이 나간 채 억지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캐나다에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 어른들의 컨디션은 최저점을 찍었다. 관광 스팟에 버스가 멈춰 설 때마다 내리는 속도가 느려지는 그들에게 타인의 감정을 살필 여유와 서로의 이야기를 궁금해할 호기심은 남아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나를 내 안에 숨긴 채 시작한 여행이었지만 그동안은 낯선 풍경과 여행지마다 달라지는 공기가 나의 주의를 돌려주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는 동생과 몇 년만에 진득이 나누는 이야기도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몇 시간을 달려도 반복되는 거리의 풍경과 하루종일 비슷한 레퍼토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생과의 대화는 더 이상 아무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여행 7일 차, 나는 궁극의 ‘대화 욕구불만 상태’를 맞이했다.
긴 시간을 달린 버스는 보스턴과 뉴욕 사이 시골 동네의 한 호텔 앞에 멈춰 섰다. 일주일째 반복되는 일이었기에 사람들은 졸린 눈을 크게 뜨는 노력조차 들이지 않고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 앞에 놓여있는 수많은 캐리어들 중 우리 것을 찾고, 북적이는 로비에서 ‘7명 팀’이 호명되기를 기다리고, 가이드님이 우리를 부르면 얼른 달려가 받아온 카드키를 3팀으로 나눠 배정하고, 빠트린 짐이 없는지 걱정하는 아빠를 위해 함께 캐리어 개수를 센 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셋째 날까지 함께 야식을 먹기 위해 정했던 집합 약속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들 카드키를 받자마자 바쁘게 객실 문을 닫았다. 나와 이모, 엄마가 함께 쓰는 객실 문이 열리자마자 두 사람은 짐가방을 아무 데나 세워두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잠깐 와이파이 연결을 위해 로비에 다녀온 사이 나의 룸메이트들은 잠들어 있었고, 적막한 객실의 공기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적막을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구와든 대화를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머릿 속을 가득 채웠다. 아빠와 함께 방을 쓰는 동생을 불러낼 수도 있었지만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같은 주제의 반복도, 하나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묘하게 어긋나는 관점과 생각도 나를 주저하게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족이기에 다 안다는, 그리하여 내 생각과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다는 미적지근한 태도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며칠 전 이야기를 나눴던 운전기사가 떠올랐다. 한 시간에도 몇 대씩 담배를 피우는 그라면 무조건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담배와 외투를 챙겨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흡연구역에 그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1층 버튼을 눌렀다.
흡연구역에는 아무도 없었다. 눈에 들어오는 텅 빈 벤치가 마음을 휑하게 만들었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와 로비의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정처 없이 기다렸다. 10분쯤 흘렀을까,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다그치는 목소리가 내 안에 울렸다. 버티고 앉아있기에 너무 커지는 목소리에 머쓱해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여전한 적막함. 나는 뛰쳐나가듯 문을 열고 나와, 다시 흡연구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에 그가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그에게 다가가 “같이 펴도 돼요? Can I join you?”라고 물어보았다. 옆으로 옮겨 앉는 행동으로 답을 대신하는 그의 앞에 서서 나는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가 자신의 라이터를 내밀어 불을 붙여주었고, 우리의 두 번째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의 이름은 레이몬드였다. 이십 대처럼 보이는 그는 서른아홉이었고, 세 남매를 키우는 한 가정의 아버지였다. 동아시아인 특유의 (그는 중국계 미국인이었다) 동안 유전자가 지구 반대편에서도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뉴욕에서 태어났고, 한평생 그곳에서만 살았다는 그는 뉴욕을 집 같은 곳이라고 표현했다. 말을 주고받을 때마다 운전기사와 승객이라는 피상적인 관계는 담배연기와 함께 날아가고, 레이몬드와 나라는 구체적인 두 사람의 작은 관계가 재와 함께 쌓여가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그가 앉은 벤치의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그의 팔을 뒤덮은 타투를 가리키며 관심을 보이자 그는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짚어가며 언제, 어떤 이유로 하게 되었는지 말해주었다. 나도 옷 소매를 걷어부쳐 나의 타투를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나의 왼손 약지에 자리한 반지로 주제가 옮겨갔다. 그가 나에게 결혼했냐 물었다. 대답은 “No”였다. 그럼 남자친구가 있냐고 물었고, 다시 나의 대답은 “No”였다. 의아한 표정으로 “Why?”라고 묻는 그에게 나는 여자친구가 있다고 말했다. 5년간 연애 중이고 지금은 동거인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는 나의 소속-여행 내내 나의 이름은 7명 팀의 딸내미였다-을 떠올려 부모님도 아는 사실이냐고 물어왔다. 역시 나의 대답은 “No”였다. 스무고개처럼 이어지는 질문과 일관된 대답 속에서 나는 여행 내내 나를 고립시킬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를 발견했다. 기를 쓰고 나를 숨겨야 한다는 사실이, 진짜 나의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냉대와 외면 또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폭발이 돌아올 거라는 두려움이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담배도 피고, 타투도 있고, 여자친구와 연애도 하는데 이 모든 걸 숨기고 여행하려니 너무 힘드네요.” 허탈한 웃음과 함께 내뱉은 한 마디에 여행의 고통이 담겨있었다. 다정하게 웃으며 위로를 건넬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그는 차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넌 더 이상 아이가 아니잖아 But you’re not a kid anymore” 모든 건 너의 선택이지, 너의 인생이고. 이어지는 그의 말은 내 안의 어딘가를 깊이 관통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강한 동력이 무엇이냐 누가 물어온다면, 모두가 입을 모아 “인정욕구”라 말할 것이다. 아무리 피곤해도 “잘한다”는 한 마디에 눈이 또렷해지고 힘이 솟아나는 나는 칭찬을 먹이로, 인정을 연료로 달리는 기관차였다. 과부하가 올 정도로 달리고 열을 식힐 틈도 없이 다시 인정을 향해 달려나가며 그 총량은 점점 커졌지만, 나는 만족을 몰랐다. 밖에서 나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이상 내 안이 저절로 채워질 리 없었다. 타인에게 나의 존재 가치를 매길 수 있는 채점 도구를 맡겨두고 살고 있음을 깨달은 후에야 내 발에 채워진 두꺼운 족쇄가 보였다. 그렇게 인정욕구에서 벗어나는 것은 나의 숙원사업이 되었다. 나의 고민을 들은 사촌언니가 “네 인정투쟁의 근원을 찾아봐. 그걸 해결하지 못하면 절대 편안해지지 못할걸”이라고 말했고, 고민끝에 찾은 나의 근원은 현대인 대부분이 그렇듯 부모님이었다. 좋은 결과를 내어 부모님의 인정을 받을 때면 나의 존재감이 명확해졌고, 사랑받는다는 감각이 선명해졌다. 부모님과 다른 가치관을 확립하고, 나만의 기준으로 삶을 만들어나간다고 생각했지만 나의 무의식은 늘 부모님의 인정을 갈망하고 있었다. 내가 갈고 닦은 나라는 사람과 지금 살고 있는 삶이 부모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은 두려움으로, 슬픔으로, 패배감으로, 그리고 끝내 무력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밖에서 PRIDE를 외치고 다니는 나였지만, 사실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감 없이 위축된 아이가 웅크려 있었다. 여행 내내 숨어있던 그 아이를, 그의 한 마디가 건드렸다. 그리고 말해주었다. “넌 더 이상 아이가 아니야. 이건 네 인생이야.” 무심하게 던져진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그 아이는 고개를 들었다. “그렇죠”라고 대답하며 끄덕이는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내 안의 아이가 함께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도 해 주지 못했던, 해 줄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