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여름, 나는 다시 무지개 스타킹을 신고 2호선 열차에 올랐다. 스물다섯 번째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2년 전의 나는 축제에 도착하기만 하면 환대와 연대의 공기가 완벽히 준비되어 나를 맞아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준비 땅!’하면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가짐과 행동이 모여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수동적인 자세로 그 공기를 소비하려던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가 먼저 눈 맞추고 손 내밀겠다는 다짐, 슬픔의 축제가 아닌 기쁨의 축제를 만들어보겠다는 의지가 내 안을 채우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나는 을지로입구역에 도착했다.
나의 축제는 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친구들을 만나기 전 옷매무새를 다듬으려 들른 화장실은 많은 사람이 북적이고 있었고, 나의 양 옆에는 축제를 즐기기 위해 이런 저런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울로 한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망설임 없이 말을 건넸다. “오늘 축제 가시나봐요?” 깜짝 놀란 상대는 환하게 웃으며 그렇다 대답했고 나의 무지개 스타킹이 멋지다며 칭찬으로 화답했다. 자리를 뜨며 우리는 오늘 좋은 하루 보내라는 이야기를 서로에게 해 주었다. 나는 웃으며 계단을 올랐다.
나와 친구들은 역 앞에서 만났다. 오늘 하루를 함께 만들어 갈 두 사람, 간장과 소금은 이성애자였지만 앨라이(성소수자는 아니지만 차별에 반대하고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서 함께 축제에 왔다. 퀴어문화축제가 처음인 두 사람은 새벽같이 일어나 만반의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축제 장소의 수많은 인파와 카메라, 혐오세력에 놀라 움츠러 들어있었다. 소수자로 낙인 찍힐 수 있다는 걱정과 누군가의 맹렬한 공격의 대상이 된다는 두려움을 온몸으로 겪으면 누구나 숨고 싶어진다. 나 역시 너무나 잘 아는 감정이었기에 그들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먼저 마음의 허들을 낮춘 건 소금 쪽이었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축제의 장을 채운 사람들이 너무나 자유로워 보였기에 그녀는 용기를 내 “가보자!”고 말했고 그제야 두 사람은 볼과 눈 밑에 붙은 무지개를 빛내며 웃었다. 우리 세 사람은 온몸으로 사람들을 환영하고 있는 스태프의 손짓을 따라 축제로 입장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수많은 반대에 부딪혔고, 축제는 서울광장이 아닌 서울시내에서 진행이 되었다. 광장에 비해 턱 없이 좁은 차도의 양쪽에 부스들이 줄 지어 있었고 부스 앞에 몰려 있는 사람들 사이로 길을 만들어 지나다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곳에서 누군가와 멈추어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가능할까?’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광장의 한산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말 걸기를 해 나갈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거리가 먼 여건이었다. ‘그래도 해 봐야지’ 2년간 삶으로 배워나간 말 걸기의 경험을 믿어보기로 했다. 나는 가방에서 만들어 간 스티커를 꺼냈다. “말 걸기 환영”이라는 글씨가 크게 쓰여있는 원색의 스티커였다. 친구들의 몸 곳곳에 스티커를 붙여주고 나도 팔과 등, 허리에 스티커를 붙였다. 우리는 좁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인파를 따라 걷다 보니 축제의 흐름에 몸이 맞춰졌다. 긴장감이 낮은 상태에서 서로를 마주하며 나누는 편안한 대화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사람들 간의 거리가 좁다보니 서로를 더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북적이는 인파는 각자의 높은 에너지를 서로에게 빠르게 전이시켰고 모두가 높은 에너지로 축제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꼭 나른하고 안전한 상황에만 긴장이 풀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던가. 술에 취하거나 흥이 돋았을 때 타인에 대한 방어가 느슨해지듯, 지금의 높은 에너지가 서로를 향한 경계를 풀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로 놀던 나의 심장박동과 축제의 템포가 어느새 같은 박자로 뛰고 있었다. 흐름을 타기 시작하니 수많은 말 걸기의 기회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축제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오늘 멋져요!”라는 인사를, 푸른 색의 헬륨풍선을 들고 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는 “이거 어디서 받을 수 있어요?”라는 질문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다. 경계 태세를 취하던 간장과 소금도 완벽히 축제의 분위기에 녹아 들어 있었다. 대구퀴어문화축제 부스에 들렀을 때 간장은 큰 목소리로 “저희 대구 출신이에요!”라고 말하며 반가움을 마음껏 표현했고 그 부스에 온 다른 대구 출신 손님들과 하이파이브까지 했다. 우리는 작고 큰 말 걸기를 하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고, 어느새 공연 무대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댄스 무대를 마친 공연자들이 퇴장하고, 밴드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든 락 장르의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락덕인 소금의 놀라운 행동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을 잊고 드럼과 기타의 소리에 자신의 몸을 맡겨 뛰던 소금이 옆에서 음악을 즐기던 다른 무리의 사람들에게 다가간 것이다. 음악으로 하나가 된 그들은 성큼 다가온 소금을 보고 놀란 기색도 없이 어깨 동무를 하며 함께 뛰기 시작했다. 그 강렬한 화합은 간장과 내가 범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 소금한테 많이 배워야겠다…” “그래… 고수가 바로 눈 앞에 있었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그저 바라보며 우리는 말했다.
이제 행진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행진을 이끄는 트럭을 따라가기 위해 사람들은 입구 앞에 빼곡히 줄을 서 있었다. 그때, 나의 친구가 저 멀리 보였다. 나는 달려가 친구와 그녀의 일행에게 인사를 했다. 손을 마주치며 반가워하던 친구가 내 팔에 붙은 스티커를 보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이거 뭐야!” 나는 말 걸기 프로젝트를 간략히 소개하고 그들에게도 스티커를 붙여주었다. “누가 진짜 말 걸면 어떡해…?” 내향적인 친구의 애인이 겁에 질린 듯 뱉은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우리는 트럭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 민소매와 반바지를 입은 내 살갗을 따뜻한 햇볕과 뜨거운 바람이 기분 좋게 간질였다. 모두가 따라 부를 수 있는 케이팝 음악이 울려퍼지는 그 순간, 내 옆에는 간장과 소금, 그리고 수많은 ‘우리’들이 있었다.
안전을 위해 천천히 걸었던 걸음은 트럭이 대로변으로 빠져나온 후 점점 빨라졌다. 신나는 음악은 무한리필로 재생되고 있었고 나는 발로 박자를 쪼개며 바쁘게 댄스스텝을 밟았다. 소금과 간장이 준비해 온 탬버린이 짤랑거리며 흥을 배로 돋구어주었다. 행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흥이 오른 건 우리만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외국인이 “I’m so happy!”라고 외쳤고, 대답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겨를 없이 나는 그를 바라보며 “yeah!”라고 외쳤다. 그 순간 나는 그의 거울이었다. 그의 행복하다는 말은 고스란히 나의 것이 되어 있었고, 그와 눈을 마주치며 웃었을 때 우리의 행복감은 서로를 거울 삼아 반사되며 점점 더 커져갔다. 간장과 소금과 나는 일렬을 만들었다가, 흩어졌다가를 반복하며 각자의 템포로 행진을 이어갔다. 사라졌던 소금은 공연을 볼 때 함께 뛰었던 무리의 사람들을 데리고 나타나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내 등에 붙은 “말 걸기 환영” 스티커를 보고 말을 걸 지 말 지 고민하는 사람에게 가 보자며 손을 잡고 데려오기도 했다. 스티커를 보자 너무 반가웠고 흥미가 생겨 내게 인사를 하고 싶었다는 그녀 앞에서 나는 잇몸을 숨길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의 양손을 잡고 마구 흔든 나는 그녀와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를 하고, 그녀의 목 뒤에도 스티커를 붙여 주었다. 긴 호흡으로 대화를 나눌 수 없었지만 수많은 인파 속에서 서로를 알아봤다는 반가움, 주파수가 맞았다는 짜릿함이 두 사람을 감돌았다. 선두를 이끄는 트럭의 재생목록은 탁월했다. 떼창구간이 명확한 노래가 나오자 사람들은 한 목소리가 되어 노래를 했고, 내가 큰 소리로 박수를 치자 주변 사람들이 같은 박자로 박수를 따라쳤다. 같은 음정과 박자로 살아 움직이는 감각, 우리의 연대는 그렇게 살아 숨쉬고 있었다.
행진을 마친 후 휴대폰을 확인하니 조금 전 만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내가 붙여 준 스티커를 보고 사람들이 말을 걸었다는 소식이었다. 친구의 옷에 붙은 스티커를 보고 언론사에서 인터뷰를 요청했고, 친구의 다른 일행에게는 스티커를 가리키며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다. 갑자기 말을 걸어와 두 사람은 놀랐지만 자신을 가리키는 상대의 손을 따라 갔을 때 붙어있는 스티커를 보고 ‘아하!’하며 경계를 풀고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는 친구의 말은 내가 보지 못한 다른 곳에 불을 밝혔다. 가까운 친구들도, 가족들도 이해하지 못했던 나의 말 걸기 프로젝트는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물결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다.
2022년 여름, 내게 도착한 슬픔의 숙제는 더 이상 숙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쁨을 찾아내는 도구이자 타인의 맥락을 살필 수 있는 렌즈, 그리고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하나의 태도가 되어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무지개 스타킹은 또 한 번 걸음을 내딛었다. 그 다리는 세상으로, 그것을 구성하는 수많은 이야기들로 힘차게 걸어나갔다. 그 길에서 결코 혼자가 아닐 것을 확신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