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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May 23. 2016

뱀파이어

5g

pixabay

기분 나쁜 찝찔함에 나는 잠에서 깼다. 꼴깍. 침을 삼키자 꼬로록 소리를 내며 염분이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갔다. 잠들기 전,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양치질을 하지 않았는가. 잠시 후, 이번에는 꾸르륵 소리를 내며 염분이 타고 내려간 자리가 쓰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다.


기분 나쁜 맛에 나는 부엌으로 나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희미한 불빛에 나는 고갤 돌렸다. 가장 안 쪽에 자리잡은 엄마의 방에 불이 켜져있었다. 콜록콜록 잔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천식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기침은 계속되었고 어느덧 나는 그 소리가 백색소음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생수병을 냉장고에 넣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워 천장에 붙은 야광별을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눈이 부셨다. 여전히 미각에 남아있는 기분 나쁜 피비린내 탓에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이사오던 날 다닥다닥 붙여놓은 야광별을 셌다. 별 하나, 별 둘, 별 셋... 콜록콜록. 다시 엄마의 기침 소리가 시작되었다. 아차. 어디서부터 세기 시작했는지 까먹고 말았다.


나는 다시 의식적으로 침을 삼키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는 피 맛에 대해 생각했다. 여기서 나는 몇 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보게 되었다. 첫째, 나는 때때로 코피를 흘린다는 것. 이 경우, 뜬금없이 흐른 코피가 식도에 쌓여 숨이 막혀 깬 것이다. 잠에서 깨자마자 나는 피를 삼켰고 많은 양의 피를 삼켰기 때문에 피맛이 여전히 입에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객혈을 한 것. 나는 평소에 시도때도 없이 담배를 피기 때문에 종종 가래침과 함께 혈액을 뱉어내곤 했다. 날이 추운 날이면 가끔씩 목이 따끔거리면서 찝찔한 피 맛이 나곤 했는데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던 것이다. 셋째, 위장이 쓰린 걸로 보아 역류성식도염에 걸린 것일 수 있다. 평소 위장이 약해 신물이 올라오곤 하는데 오늘 저녁 먹었던 음식물이 목구멍까지 역류했다가 도로 들어갔을 확률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나는 지금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임이 분명했다. 그러고보니 머리가 팽팽 도는 듯 어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엄마의 기침 소리가 점점 격해졌다. 내가 자는 새벽녘에 항상 엄만 기침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현기증이 나면서 천장 위의 야광별이 블랙홀로 빠져들듯 돌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던 피를 배출했다면 그만큼 보충해야 한다. 내 몸은 그런 능력이 저하되었기 때문에 빈혈약을 달고 살았다. 생각해보면, 야광별도 사실은 엄마가 붙여준 것이었다.


엄마는 하얗고 말랐지만 키가 컸다. 또래 여자들보다 키가 컸기 때문에 왜소하다는 느낌보다는 도시적인 느낌을 풍기는 여성이었다. 어릴적부터 몸이 약했던 나 대신 엄마는 내 손이되고 발이되어주었다. 한 여름날 운동장 조회시간에 픽픽 쓰러지던 나를 보고 엄마는 죽은 아빠를 닮았다 했다. 엄마는 하얗고 말랐지만 깡이 있었다. 내가 태어나던 날, 엄마는 아빠도 없이 죽음을 걸고 신과 내기를 하고 있었다. 산모임에도 몸무게가 거의 늘지않은 엄마는 깡다구로 나를 낳아 길렀다. 자신의 피를 헌혈하여 받은 증서로 자식의 피를 채우는 사람이 바로 엄마였다.


콜록콜록. 엄마가 더이상 헌혈을 할 수 없게된 것은 기침이 시작되었을 무렵이었다. 이미 외양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피를 준다는 것은 위험해보였다. 그녀의 기개어린 깡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고, 남은 건 왜소한 살가죽 뿐이었다. 그 무렵에는 이미 엄마의 키는 줄어들고 대신에 나는 엄마보다 키가 커져있었다. 엄마의 기침은 잦아졌고, 소리는 점점 커졌다. 하지만 나에게는 본래 그래왔듯 그 소리가 엄마의 살아있음을 멀리서나마 확인하는 정겨운 소리가 되어버렸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나는 아직도 한창 때 그녀만한 깡이 없었다.


다리 사이로 기분 나쁜 축축함이 느껴졌다. 다리 사이를 손으로 스윽 만져보았다. 피다. 정말 피가 난 것이었다. 그제야 현기증의 원인을 알게 되고 나는 좀 안심했다. 꽤 오랜 날 멈춰있던 생리가 시작되자, 세포들이 하나씩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 잠에서 덜 깬 약간은 몽롱한 상태로 나는 거실로 향했다. 구석자리에 위치한 엄마 방의 불은 어느새 꺼져있었다. 나는 현기증이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방문을 열어제꼈다.


빛이 하나도 들지 않는 방. 기침 소리 하나 없어 불안한 방. 그곳엔 숨소리조차 없는 창백한 가죽이 구석 방의 구석에 널브러져있었다. 가죽보단 거죽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체의 목덜미에는 이빨자국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홀과 핏줄이 지나간 자국, 머리카락에 엉겨붙은 피딱지가 소리없는 방을 채우고 있었다. 그 적막함에 나는 어쩔 도리가 없어 있는 힘껏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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