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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Feb 07. 2016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2g

[pixabay]


가만히 앉아서 허공을 본다. 문득 어제 사무실에 꼽아놓은 전기코드가 생각난다. 머리에 스파크가 튀는 듯, 다양한 생각들이 스친다. 혹시 합선이 되어서 스파크가 튀지는 않을까. 그런데 하필 책상이 나무로 되어 있으니 불이 붙진 않을까. 연휴라 그 건물에는 아무도 없을 텐데 불이 번지지는 않을까. 그런데 혹시나 우연히 화장실을 들른 여자아이가 불길에 갇혀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잿더미 속에서 수사를 하던 경찰이 화재의 진원지를 파악하고 내 자리에 있던 문어발 코드가 그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는 않을까. 결국 불길 속에서 유명을 달리한 여자아이의 유가족들은 평생 나를 원망하고, 나는 조심성 없는 사람으로 세상에 낙인찍히지는 않을까.


정말 쓸데없는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은 이미 불안이 가득한 상태이다. 그런 상태가 되면 꼭 집에 가스레인지를 켜 놓고 외출한 것처럼 불안해진다. 아니야. 그렇다고 해도 저 정도의 사건이 일어날 확률은 로또 맞을 확률보다 낮다. 나는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치우고 TV를 보기로 한다. 빠른 속도로 화면이 지나가고 어느새 거기에 빠져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TV를 보면서도 웃음기는 없다. 문득 생각한다. 내가 이걸 왜 보고 있지?


아, 잊기 위해서 보고 있었구나. 무엇을? 어제 사무실에서 빼놓고 나오지 않은 전기코드들을. 그때부터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잊기 위한 일이 되고, 잊기 위한 일들을 함으로써 더 또렷이 내가 잊어야 하는 목적을 생각하게 된다. 책을 편다. 책을 보다 보면 잠이 오겠지. 공교롭게도 어린 왕자가 술꾼을 찾아가는 페이지다. 아저씨는 왜 술을 드세요?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지. 무엇이 부끄러운데요? 술을 마시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 그렇게 나는 이 책을 잃는 목적을 또다시 생각하고야 만다.


잠이 안 온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로또 1등 당첨자가 23명?! 이 정도 확률이라면 충분히 사무실에도 불이 날 수 있다. 나는 지금 도박사의 오류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불이 날 확률은 0.0000000001%가 아니라 불이 나거나, 나지 않거나. 그러니까 50%인 것이다. 나는 밤 11시에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간다.


밤바람이 차다. 연휴 기간 밤에는 지하철이 한산하다.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마음은 왠지 편안하다. 가까스로 회사 건물 앞이다. 건물 입구는 철창이 닫혀있다. 사무실이 있는 4층을 바라본다. 고요하다.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래. 아무 일 없겠지. 없어야만 한다.


그런데 만약, 내가 간 후 불이 나게 되면 지금 이 시간에 회사 건물을 찾아온 내가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오르지는 않을까? 만에 하나 내 자리에서 시작된 불길이 아니라 회사에 대한 보복으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방화한 것이라면? 그럼 나는 억울하게 방화범으로 몰려 누명을 써야 한단 말인가? 나만 바라보고 있는 우리 가족들은 어떻게 하지? 내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을까? 그러니까 지금 시간이....


아차, 늦었구나. 나는 지하철을 향해 달려간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이제 막 문을 닫은 막차가 굉음과 함께 터널을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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