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군대에서 강조되던 말 중에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배식에 실패한 취사병은 용서받을 수 없다”라는 말이 있었다. 전쟁의 성패라는 거시적 관점보다는 지금 당장 한 끼 밥의 중요성을 아주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화는 틀림없이 중국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그 증거로 고대 국가인 은(殷, - 당시 우리나라는 고조선) 나라 때부터 수 백 년간 '밥 솥'은 국왕의 권위를 상징했다. 즉 배식의 권한을 가진 사람의 중국의 황제였던 것이다. 중국의 밥솥은 경배의 대상이었으며(밥솥에다 절했다) 당시의 첨단 테크놀로지가 모두 구현된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 밥솥에 새긴 글자를 금문(金文)이라 하는데 당시는 청동도 금이라고 불러서 금문이라고 한단다.
최근 들어 압력 밥솥의 원조가 중국이며 중국은 이미 2,000년 전에 압력 밥솥을 썼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 근거로 제시된 것이 만성이라는 곳에서 출토된 한(漢) 나라(1) 시대 곰 모양의 발이 달린 구리 솥(满城汉墓出土熊足铜鼎)이다. 솥뚜껑과 그것을 고정시키는 장치가 있어 현재의 압력 밥솥과 유사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현재의 압력솥 고무 패킹을 빼고 사용해 보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내가 볼 때는 음식을 중간에 누군가 훔쳐 먹을 까 봐 뚜껑을 닫고 고리를 채워 봉인했다는 것이 중국인의 기질이나 상황에 맞는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상상이다.
압력 밥솥의 역사적 기원을 따진다면 당연히 '가마솥'에서 찾아야 한다. 무쇠(주철)로 만든 가마솥 솥뚜껑은 무척 무겁다. 손잡이가 달린 가운데 부분을 특히 두툼하게 만들어 묵직하게 누름과 동시에 내부의 열과 수증기를 가두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가마솥에 조리한 음식의 풍미는 그렇지 않은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조왕신(灶王神)의 영역인 부엌 중간에 들기름을 적당히 머금고 듬직히 앉아있는 가마솥이야 말로 솥 중의 솥이며 압력 밥솥의 조종(祖宗-제일 높은 할아버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은 우리 버선을 가져다 머리에 쓰는 모자로 사용했고 요강을 가져다 설탕 그릇으로 썼다. 그 결과 일본은 패션과 도자기 분야에 있어 우리보다 앞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위대한 솥 중의 솥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엌을 실내로 이동시키는 주거 혁명의 과정에서 '기능은 유지시키되 크기와 사용 방법은 실내 환경에 맞도록' 하는 처절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고작 가마솥 뚜껑에 삼겹살을 구워 먹고 있다가 일본의 전자제품인 코끼리 밥솥을 수입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과거의 치욕을 씻고 창조적인 '압력 밥솥'을 만들어 인류 식생활에 크게 공헌했다.
작금에 중국에서도 그 가치를 깨닫고 '밥솥 공정'을 획책하고 있다. 이에 역사적 사실과 물적 증거에 기반한 사실을 밝혀 뒷날을 대비하고자 한다.
(1) 한나라는 우리 고조선을 멸망시킨 나라이고 불알 없는 내시들이 득세한 나라였다. 한고조 성명은 유방인데 황제가 포로로 잡힌 전력이 있다. 유방의 부인은 지독히 잔인한 여편네였다.
위 사진 : 만성이라는 곳에서 출토된 한(漢) 나라(1) 시대 곰 모양의 발이 달린 구리 솥(满城汉墓出土熊足铜鼎)이다. 솥뚜껑과 그것을 고정시키는 장치가 있어 현재의 압력 밥솥과 유사하다는 주장이다.
아래 사진 : 권위의 상징이었던 중국의 솥(鼎)들. 사람보다 큰 것도 많다. 고대 중국에는 코끼리가 서식 했었 다고 한다. 코끼리를 요리 하기위한 것인지 또는 꼬끼리에게 먹일 밥을 조리하기 위한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정도 크기의 솥은 전세계에서 중국에만 존재하다.
아래 사진이 취사도구로서의 솥의 모습이다. 솥 중의 솥이며 압력 밥솥의 조종(祖宗-제일 높은 할아버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의 솥이 무척 커 보이 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큼직한 가마솥이 해인사에 있었다. 가마솥이 어찌나 큰지 동짓날 끓이는 팥죽을 젓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난 중이 여러 날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동해보다는 작다고 겸손하게 마무리한다.
조선 성종 때 촌담해이(村谈解颐)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