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가장 부끄러운 단어 하나를 고르라면 단연 효도(孝道)를 꼽겠다. 특히 한문으로 어렵게 써진 책에서 폼 잡고 이야기하는 효도를 기준으로 한다면 나는 개나 말보다도 못하다.
자유가 효도에 대하여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근자의 효도는 잘 부양하는 것만으로 생각하나 개와 말이라 하더라도 모두 부양은 하고 있다. 공경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구별하겠는가?”①
부모님을 잘 부양하기는커녕, 퍼마실 술 다 퍼마시고, 할 짓 다하고 살았으니 개나 말도 하는 일을 나는 하지 못한 것이다. 부모님께 대들기도 했고 쌩깐 적도 적지 않으며 뻥치고 삥땅 친 적도 있으니 공경은 언감생심이다.
자! 내가 이럴진대 내 자식들에는 어떤 효도의 기준이 제시돼야 할까? 나도 지키지 못하고 지금도 지키지 못하는 기준을 들이대고 ‘불효자’라고 타박을 한다면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 아닌가?
“아무도 지키지 못하면서 지켜야 한다고 박박 우기는 것을 대를 이어 계속하는 것”
내가 볼 때 『논어』의 가장 개그적인 부분이 이점이라고 생각한다. 2500년 동안 서로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꼭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웃기는 상황을 개그라고 표현한 것은 틀림없이 잘못은 아니다. 우리는 그 상황을 ‘효도’라고 부른다.
이미 논어에 등장하는 ‘요즘 (今之)’라는 표현을 보면 2500년 전에도 그랬고 오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의 문제’가 그때도 있었다는 이야기 아닌가? 연평도의 꽃게가 앞으로 걸으라고 2,500년 동안 가르쳐온 결과, 지금의 꽃게는 앞으로 걷는가? 아직도 옆으로 걷는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그러나 내가 과문한 탓인지 아무리 고전을 읽어 보아도 전혀 답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게 강조해 마지않던 효도에 관한, 냉정한 비판과 성찰은 없고 마치 종교 교리처럼 무 조건적으로 해야 하는 것 그렇지만 하지 못하는(않는) 항목이 된 것이다.
따라서 나는 동양고전은 절대 효도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틈만 나면 대들고 시간 여유만 있으면 쌩까고 살살 거짓말하는 자식들 꼴을 두고만 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 고민에 대한 해답을 나는 ‘생명’에서 찾았다. 거창한 이야기로 ‘지속 가능한 삶’이다. 예를 들면 가질 수 있는 만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 갖는 것, 좀 더 쉬운 예로, 음식을 먹을 만큼만 상에 올리고 식사가 끝났을 때 그릇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삶과 효도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지속 가능한 삶의 관점은 과거보다 미래에 있다. 지금 우리의 삶은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것이라는 관점에서 아이들로부터 빌려온 것이라는 관점으로의 이동이다.
미래를 미래에게 돌려줘야 한다
아버지가 미래를 돌려줘야 아들딸이 지금과 다른 미래를
꿈꾼다②
바닷가 땅끝마을 해남은, 육지 쪽으로 돌아서면 땅의 시작이 된다. 십 년, 이십 년 앞으로 나아가 지금을 돌아보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보인다. 나는 이렇게 그만큼 살다가 노년에 이르러 자식들에게 효도를 강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건강하고 행복한 나와 아이들의 미래를 상상하며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뭔가를 ‘지금’ 하고자 할 따름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뱀발을 달자면, 나는 부모 봉양 대신 자식 care를 주장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날 낳아 주신 은혜’ 어쩌고 하는, 케케묵은, 말 같지 않은 논리에서 자유롭자는 이야기다. 난 은혜를 베풀기 위해 자식을 낳은 적이 없다. 나 좋아 뭘 하다 보니 나온 게 자식이다.
쓸데없이 의무감에 찌든, 강요된 사고로 부모를 생각하면 무거운 짐이 될 뿐이다. 하지만 십 년 후, 이십 년 후로 가서 변해 있을 나와 더 많이 변해있을 부모를 상상해 보자. 지금 이렇게 부모를 대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우리 생의 뿌리는 미래에 있다
저 칙칙한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
그렇다면 미래에서 돌아보자
미래로 가서 지금 여기를 뒤돌아보자③
효도하는 아이들보다 미래에 가서 여기를 뒤돌아보는 아이들. 나는 그런 아이들의 부모가 되고 싶다. 그래서 내가 먼저 미래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