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미국을 넘을 수 있을까?' 이 명제에 대한, 연구와 분석은 지겨울 정도로 많다. 나는 중국을 전공하고 중국에서 생활했고 사업을 하는 중국 전문가로서 명료한 결론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중국은 절대 미국을 넘을 수 없다!!
그 답은 미국에서가 아니라 중국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 중국에는 예·악, 즉 예절과 음악이 없다.
예의는 불평등을 조화시키는 사회적 기제인데, 모두가 평등하다는 건조한 공산당 이론을 국가 대원칙으로 설정한 이상, 예의는 존재할 공간이 없다. 다만, 서로의 목적에 복무하기 위한 대화의 기술 정도가 유지될 뿐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예의를 경험한다는 것은 흐린 황하 물이 맑아지길 바라는 것①과 같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의도를 갖지 않고 몸에 밴 친절을 느끼거나, 공경을 담고 있지만 비굴하지 않은 언어 표현을 듣는 것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음악의 경우는 더욱 참혹할 정도이다. 지난 100년 동안 전 세계의 대중음악을 선도한 미국과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팝송, 컨트리, 블루스, 재즈, 뮤지컬, 흑인음악, 록, 포크, 댄스음악 등등 미국은 20세기 이후 대중음악의 발생지이자 가장 큰 소비처이기도 하다. 중국은?
그중에 소울(soul)은, 중국에서 이미 발생했어야 하는 음악인데 아직 태동도 못하고 있다.
소울은 “1960년대 가스펠의 종교적 감성과 리듬 앤드 블루스의 전염성이 강한 비트가 한데 결합한 음악으로, ‘흑인이 흑인을 위해 만든 음악’”②이다.
쉽게 말해 리듬 앤드 블루스는 흑인들의 우울한(blue) 음악이다. 고된 노동을 이기는 노동의 노래이다. 우리나라 쾌지나 칭칭 나네~와 마찬가지로 누군가 선창을 하면 나머지가 합창으로 따라 부르는 형식(call and response)이다. 여기에 흑인 영가(negro spiritual)가 더해진 것이 소울이다. 즉 소외되고 차별받는 민중의 노래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런 음악이 백인 주류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소비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국의 2억 명이 넘는 농민공들은 그들의 애환을 담은 음악 장르가 있는가? 그들의 신산한 일상을 노래하기 위해, 자유롭게 모여 연주하고 합창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그들의 고통과 울분은 켜켜이 쌓여만 갈 뿐이다. 더욱 두려운 사실은 이들이 점점 주류사회로부터 격리돼, 보이지 않는 유령이 되어 간다는 점이다.
소울을 이야기하면 스티비 원더를 추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흑인에다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를 가졌지만, 그의 영혼은 누구보다 자유로웠다. 그의 음악은 편견이나 차별을 배격하는 미국의 양심의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그의 음악을 들으면 영혼이 공명되는 것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