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를 읽으며 가장 답답했던 부분 중의 하나가 남의 물건을 훔친 절도범을 은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자였다.
섭공이 공자님께 말했다. "우리 고장에 행실이 곧은 사람이 있는데, 그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것을 고발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우리 고장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기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깁니다. 곧음은 그 속에 있습니다."①
이 구절은 수많은 억지 해석이 난무한다. 대표적인 것이 천륜이니 인정이니 하면서 ‘공자의 높은 뜻’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려는 속이 빤히 보이는 내용들이다. 기분 나쁠 때 그런 책을 보면 속이 무척 거북해진다.
반대로 이 구절에 대해 짧고 명쾌하게 공자를 비판하는 해석을 보면 속이 다 시원해진다.
도(道)는 도이고 인정은 인정(人情)인데 어찌 뒤섞을 수 있겠는가?②
참으로 사무라이다운 깔끔한 해석 아닌가!!
공자의 절도범 은닉에 대한 비판은 현대 중국의 석학도 다르지 않다. 말이 간결하지 못하고 좀 미끈거리는 느낌만 다르다.
공자는 혈육의 정을 최고로 치는 사람이다. 그가 제창한 윗사람에 대한 휘(諱- 회피하면서 말하지 않는 것)는 중국에서 나쁜 전통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우 널리 퍼져 있다. 지도자, 부모, 스승 등이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지르더라도 감춰주는 것이 여전히 미덕으로 인정받고 있다. 잘못이 발각되는 사람은 재수가 없는 사람이다.③
그런데 지난 금요일(2022. 10. 14.) 뒤통수를 세게 맞는 경험을 했다. 서울의 한 도서관에서 시인④을 만났다. 그는 ‘삶’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너와 나의 삶이 아닌 ‘우리의 지속 가능한 삶’을 꿈꾸듯 이야기했다. 그 삶은 우리가 힘들여 만들어야 할, 기필코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과거 우리가 살아왔던 삶이라는 것을 일깨우고 싶어 했다.
그가 ‘서리’⑤를 말할 때 나는 그의, 크지 않은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틀림없이 ‘서리’를 해본 사람이다. 서리의 기초는 콩서리로 남의 밭 콩을 훔쳐 불에 구워 먹는 것이다. 그다음은 참외, 수박(시인의 눈은 이 시점에 가장 빛났다) 그리고 서리의 한계는 닭이다. 닭을 넘어서 돼지로 가면 “클~날 일”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네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콩 움큼이나 과일 몇 개, 그리고 머리 좀 굵은 녀석들이 어쩌다 닭 마리나 털어가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 놀이이고 문화이고 서로 이해 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런 걸 가지고 도와 인정을 논한다거나 절도 운운하는 것은 속 좁은 미친놈 헛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산업화가 된 지금은 어떠한가? 지금 아이들은 ‘서리’라는 말 자체도 모를 것이다. 그렇다면 산업화가 꼭 옳은 것인가? 시인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시인은 혀가 말려 들어가는 침울한 음색으로 “이러다가 우리는 다 망한다.” 고 울 듯이 말했다.
그러고 나서 이 구절을 다시 찬찬히 들여 보니 이전에 미처 보지 못한 묘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섭공은 양을 훔친 아비를 고발한 아들의 행위를 ‘행실이 곧다’라고 매우 건조하게 이야기했다. 섭공은, 아버지를 양을 훔친 절도 범죄자로, 아들은 이를 고발한 행실이 곧은 사람으로 구분해 놓았다.
섭공이 공자님께 말했다. "우리 고장에 행실이 곧은 사람이 있는데, 그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것을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섭공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으며 아들과 아버지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자의 말에는 ‘양’이 등장하지 않는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우리 고장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기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깁니다. 곧음은 그 속에 있습니다."
정확한 공자의 뜻은 저승 가서 물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충분히 상상이 간다. 우선 이름 높은 정치가가 양 한 마리 절도 사건을 화제로 삼는 게 못 마땅하다. 나도 그러니 공자는 오죽했을까?
그리고 여기에 ‘서리’ 개념을 대입해 보면 어떨까? 중국은 우리보다 큰 나라이니 우리는 닭에서 멈추지만, 중국은 ‘양’도 서리 범주에 넣지 않았을까? 전통적인 중국 뻥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상상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 절도 사건은 ‘양 한 마리 서리 장난’으로 제목이 바뀐다. 양 한 마리 서리한 걸 가지고 아들 새끼가 아비를 고발을 한다! 이런 천하에 못된 자식이 어디 있는가?
가을이 깊어가서 나뭇잎이 좀 더 떨어지면 파란 하늘과 가장 멋진 짝이 되는 것이 까치밥이다. 미물인 까치를 생각해 감 몇 개를 남기는 마음, 나아가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들을 위해 논두렁 들밥을 먹어도 고수레를 하던 우리들 아니었던가?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그 마음을 생각한다면, 이번에는 공자가 옳다.
양 잃어버린 사람은 어쩌라고? 고양이 손길도 빌린다는 바쁜 가을걷이 하는 날 부르지 않아도 찾아가 품앗이로 갚으면 될 일 아닌가?
① 리링(李零) 지음, 김갑수 옮김『집 잃은 개, 丧家狗2』(주)글 항아리. 경기, 파주. 2019. p.749. 원문은 아래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