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로부터 접촉 사고가 났다는 전화를 받은 동희 형님은 대뜸 “차는?”이라고 물었다가 여러 해 낭패를 보셨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당연히 “다치진 않았어?”를 먼저 묻는 것이 옳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본인이 멀쩡히 전화했는데 꼭 그래야 하나? 하는 합리적 의문을 떨칠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같은 상황에서 공자는 어땠을까? 당연히 동희 형님과는 차원이 다를까? 논어에 그 정황이 있다.
마구간에 불이 났다. 스승님께서 퇴조하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다쳤느냐?” 그러나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①
역시 공자님은 다르구나! 당시 말은 지금의 자동차와 같은 역할을 했지만, 훨씬 더 귀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님은 사람을 귀히 여기고 말을 천히 여겼으니 도리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②
그런데 정말 공자가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말을 천하게 여겼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은 도리(道理)일까? “성인은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아끼므로, 비록 선후와 친소의 구별이 있을망정 귀천의 구분은 없다”는데 어떻게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말을 천하게 여길 수 있을까?
가축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 사육되고, 또 잡아먹는 존재이니 지나친 의미 부여는 좋지 않은 일이다. 이런 발상은 도올 김용옥의 맥락이다.
그는 이 구절 해석의 도입부를 “『논어』 중에서 공자의 휴매니즘(humanism) 정신을 나타내는 극적인 고사”로 극찬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결론을 “사적인 공간 이외의 장소(엘리베이터 등)에서는 애완동물의 존재를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것으로 맺었다.③
말의 머리와 꼬리가 따로 노는 것은 김용옥의 특징이니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지독한 사피엔스 우월론적 시각을 가진 편협한 그의 사고방식은 주자(朱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아직도 이 땅에는 주자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우리가 닭, 소, 돼지를 먹는다고 해서 그들은 당연히 우리에게 먹힐 운명을 타고난 것은 아니다. 호랑이가 사슴을 잡아먹고 이리가 토끼를 잡아먹지만, 사슴과 토끼가 호랑이나 이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도 모기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세상을 가장 건조하게 바라보는(내 생각에) 물리학자들의 시각에서는 공자의 시각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한다. 왜 말보다 사람이 중요한가?
인문학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인간’이 가장 중요하다. 인간과 돼지 가운데 하나를 죽여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돼지를 죽여야 한다. 인간은 돼지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돼지보다 중요한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객관적인 이유가 없다면, 돼지도 비슷한 논리로 인간보다 돼지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 거다.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