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깔나게 글맛을 내는 작가가 되고 싶다
<더 나은 어휘를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이주윤, 빅피시)> 라는 책을 서점에서 구입해 야금야금 필사해 보고 있다. 심지어 내가 쉬이 손을 대지 않는 장르의 작품들을 다루고 있어서 평소에 완독을 할 수 없는 책들의 일부을 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욕심내 구입했더랬다. 그런데 이 작가님도 서문에 본인 역시 일상의 언어로 쓰인 에세이나 소설을 좋아하고 의무감으로 철학 같은 인문학 서적을 읽는다는 것을 보았다. 더 나아가기 위해 '의무감'으로 읽어내고 그랬기에 이런 책도 쓸 수 있으셨겠지.
오늘은 시간이 좀 넉넉해서 4페이지를 찬찬히 옮겨 적었다.
그 중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김유정 소설, <만무방>. 역시 읽어보지 않은 책이다. 하하.
산골에, 가을은 무르녹았다.
아름드리 노송은 삑삑히 늘어박혔다. 무거운 송낙을 머리에 쓰고 건들건들. 새새이 끼인 도토리, 벚, 돌배, 갈잎들은 울긋불긋. 잔디를 적시며 맑은 샘이 쫄쫄거린다. 산토끼 두 놈은 한가로이 마주 앉아 그 물을 할짝거리고. 이따금 정신이 나는 듯 가랑잎은 부수수 하고 떨린다. 산산한 산들바람. 귀여운 들국화는 그 품에 새뜩새뜩 넘논다. 흙내와 함께 향긋한 땅김이 코를 찌른다. 요놈은 싸리버섯, 요놈은 잎 썩은 내 또 요놈은 송이-아니, 아니 가시넝쿨 속에 숨은 박하풀 냄새로군.
진하게 음영표시를 한 여섯 군데의 단어와 문구들. '삑삑히'와 '빽빽히'. 같은 걸 표현하지만 모음 하나로 글맛이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새새이'는 '사이사이'를 표현한 거겠지? 맑은 샘은 '졸졸'거리지 않고 '쫄쫄'거리고 있다. 가랑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부수수 떨리고', 산들바람 품에서 '새뜩새뜩 넘논다'? 바람에 산들산들 살짝살짝 귀엽게 앙증맞게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흙내는 정말 흙내인데, 향긋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 향긋함이 달콤함은 아니고 살짝 풋내도 나는 것 같고 개운함 속에 쌉싸리함에 어쨌든 코를 찌르는 건 맞는 것 같다.
나는 말맛이 좋다. 말의 느낌, 단어의 느낌이 문장마다 글마다 각각 다르게 표현되고 그려지는 게 신기하고 그걸 읽어내는 재미가 너무 좋다. 기발한 표현을 신선하게 사용해서 그 글맛을 본 나의 오감을 묘하게 자극했을 때의 그 설렘이 있다. 맛깔나는 글맛을 보게 해주는 멋진 글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고 밑줄을 긋고 싶고 옮겨 적고 싶고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싶다. 내가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이다. 딱 맞는 느낌의 단어를 설령 그것이 맞춤법에 맞지 않더라도 그 표현 하나를 찾아냈을 때의 그 쾌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오늘의 '말맛' '글맛'도 괜시리 맘에 드는 단어이다.
같은 노랑이라도 노랗고 노오랗고 샛노랗고 노르스름하고 누렇고 누리끼리하고 등등 색상표의 #000000 처럼 딱 떨어지는 경계가 명확한 칼라감과는 다른 느낌을 지니고 있는 우리말의 표현이 재미있다. 또 같은 장면을 묘사해도 조금 더 깊이 있는 표현이 가능한 단어들이 있는 우리말이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같은 책에서 '녹음'이라는 단어를 인용했는데 여기서도 머리를 탁 때렸다. 단지 푸르름을 넘어선 '푸른 그늘'. 푸른 이파리는 물론 그로 인해 만들어진 (뭔가 묵직하고 시원한) 그늘까지 느끼게 하는 단어라고. 이 단어를 몰랐다면 그냥 '초록잎이 무성하다'로 쓰고 넘어갔을 거라고.
이렇게 머리를 탁탁 깨어가며 읽고 필사하고 생각을 이어가고 있는데, 그 다음장은 더 대단했다. 오늘 머리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어서 계속 나를 깨는 생각을 하게 된건지. 다음 장은 보후밀 흐라발 이라는 작가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 이었다. 역시나 처음 보는 작가에 처음 보는 제목이었다. 오늘 읽지 않았으면 평생 몰랐을. 책에 실린 전문을 옮기지는 않겠지만 이 부분은 꼭 적어두고 싶었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활자에 찌들었다'. 찌드는 것은 부정적인 느낌의 단어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찌들었는데 그의 머릿 속에는 맑은 샘이 흐리고 그 물줄기는 근사하게 흘러나온다.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부정단어인데 긍정결과가 나온다니. 그런데 묘하게 이 문맥에는 이 단어가 나쁘지 않다. 오히려 더 강하게 와닿는다. 찌들어 살았어서 오히려 좋아.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의 제목도 그러하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고독은 조용한 상황인데 시끄럽다고 표현하다니.
괜시리 욕심이 나서 나도 이런 어긋나는 단어의 조합을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근데 사실 필사를 하며 생각을 끼적일 때는 찾을 수 없었다. 내공이 부족하다. 욕심이지. 아! 갑자기 하나가 막 간질간질 올라오려고 하는데.. 마음 편히 먹어보는 욕심...? 욕심은 막 안달나야 되는데, 안달까지는 안나는데 욕심은 나니까. 음...이정도면 70점짜리는 되려나?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