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게 둥둥둥
어제 휴대폰 진동이 지이이잉 울렸다. 진동모드의 카톡 알림이었다. [대출도서 연체 안내]. 빌려놓고 읽지 못한 책이 하루 연체 되었다고 메시지가 왔다.
<두 번째 엔딩> 김려령, 배미주, 이현, 김중미, 손원평, 구병모, 이희영, 백온유
아파트 도서관 서가에서 책을 둘러보다가 아는 작가님들이 여럿 분포하고 있는 단편소설집이라 호기심에 빌려왔었다. 심지어 최근 빠져있는 이희영 작가님이 있어서. 하하. 뭐 그 날도 욕심을 내서 여러 권을 빌려왔기에 밀리고 밀려있다가 이렇게 연체문자를 받게 되었다.
그냥 반납했다 다시 읽을까 하다가 어짜피 이 오전 시간에는 도서관이 문 여는 시간이 아니었기에 읽어나보자 하고 첫 장을 펼쳤다. 김려령 작가님의 페이지가 먼저 나왔다.
주인공 이름이 '만지'였다. 어? 동생이 학교폭력으로 죽었다고 한다. 동생은 '천지'란다. 아니, 이 내용은!
김려령 작가님의 '우아한 거짓말' 이잖아?
이 책은 작가님들의 대표작의 뒷 이야기를 풀어낸 묶음 소설집이었다. 그렇다면 이희영 작가님은 어떤 소설의 뒷 이야기를 풀어썼을까 바로 넘겨보았다. '페인트'였다. 와 이 컨셉 너무 신박해!! 그럼 백유연 작가님은 '유원'일까 '페퍼민트'일까? '유원'이었다.
연체해도 이건 읽고 반납이다.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이현 작가님은 <철원,1945>였나? 제목만 알고 있었던 소설이 녹여져 있었고, 사실 처음 알게된 김중미 작가님의 이야기 '나는 농부 김광수다'는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원 소설 찾아서 읽어보고싶다. 이 김광수가 본 소설에서는 어떻게 존재하는지 궁금해서 말이다.
아무튼 아직 완독은 하지 못했다. 완독 후에 하나하나 곱씹어 기록하고 싶다. 미리 써보는 <두번째 엔딩>이야기.
정말, 책의 세계는, 이야기의 세계는 끝이 없다. 우주가 끝이 없다는데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정말 무한한 우주여행을 하는 것과 같다.
오늘 오후에 이 <두 번째 엔딩>을 읽다가 또 혼자 '청소년 소설'에 감동하여 얼른 옆에 있던 노트북을 켜서 끄적였다.
'내가 청소년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글을 끼적여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냥 손가락이 움직이는대로 러프하게 막 타자를 쳐 내려갔다.
한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일생을 읽는다는 것이다. 뭐 이런 비슷한 말을 어디선가 보았다.(찾아봐야지) 소설 역시 한 인물의 인생을, 더 자세히 세세하게 관심을 가진다면 그 주변인물들의 삶과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내가 알지 못했던 다른 생각과 세계를 그들의 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청소년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그 안에 다양한 청소년들이 있다. 우리가 무심결에 우리의 잣대로 판단하고 넘겨짚었던 그들의 속내를 알 수 있다. '꿈'이라고 하는 것에도 그러하다. 우리는 청소년이라면 꿈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왜? 굳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 꿈이 있는 아이들도 꿈이 없는 아이들도, 확고한 하나가 있는 아이도, 너무 많은 아이도. 바뀌는 아이도 확신이 없는 아이도. 그 꿈을 정하는 시기는 빨리 올 수도 느리게 올 수도, 아이들마다 속도가 다 다른 것인데, 우리는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일까) 아무렇지 않게 물어본다. "너 꿈이 뭐니?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나는 그래서 청소년 소설이 좋다. 아이들의 속내를 조금이나마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공감해줄 수 있는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모두가 사랑스럽고 모두가 대견스럽고 모두가 안쓰럽고, 그 모두를 응원하고 싶다.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믿음이 생겨난다.
예전에도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었던 게 기억나서 찾아보니, 청소년 소설을 읽다가 이야기 속 인물들에게 빠져들어 '청소년 소설을 흡독하는 이유'에 대해 간략하게 글을 썼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일 전에 쓴 글이었다.
그때는 근처에 컴퓨터가 없어서 끼워두었던 엽서에 막 써내려갔고 이를 뒤에 컴퓨터에 옮겨두었었다.
청소년 소설을 '흡독'하는 이유(흡독은......그냥 그 때 내 글맛에 맞추어 쓴 단어인데 마음에 든다.ㅋㅋ 흡입하듯 마구잡이로 읽어대는 독서법)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내가 모르는 아픔을 견디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들에게 공감하고 함께 슬퍼해주며
그들이 그 아픔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극복해가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어린이, 청소년, 자라날 가능성이 무한한 젊음인 것이 좋다.
또 하나,
'사람'이 있어서 좋다.
어린이, 청소년의 성장을 도와주는 단단하고 든든한 '사람'이 있어서 좋다.
친구이기도, 선생님이기도, 부모이기도
아님 어떤 초월적 존재이기도
그리고 성장해가는 '나 자신'이기도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존재가 안정되어 가려고 하는 그 긍정적인 방향이 읽혀서 좋다.
오늘 느낀 것과 비슷한 결이다. 비슷한 결인걸 보니 나는 정말 이러한 이유로 청소년 소설을 열심히 읽나보다. 100일 전의 내 글을 보니 나 참 한결같구나, 피식 웃었다. 아무튼 나는 요즘 이렇게 책의 우주에 빠져 우주공간을 유영하고 있는 유영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