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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라키 Nov 29. 2020

독서의 의미

읽기 위한 핑계

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책을 읽고 나서 나중에 누군가 그 내용을 물었을 때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건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라고. 기억하지 못하면 책을 읽는 의미가 없지 않은가 하는 말이었다.


동의는 할 수 없었지만 괜히 뜨끔해서 반박은커녕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그렇기 때문이다. 읽었지만 곧 대부분은 잊는다. 기억하려 해도 뒤죽박죽 섞여서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심지어 난 책을 한 장 한 장 꽤나 천천히 곱씹으며 읽는 편이다. 책장을 넘긴 후에도 앞의 내용이 생각나지 않으면 다시 넘겨서 읽고 넘어간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시간도 오래 걸린다. 심지어 온통 그림에 글은 몇 자 되지도 않는 만화책도 그렇다. 남들은 몇 분 걸리지 않는 만화책 한 권을 한 시간씩 걸려 보기도 한다. 그렇게 열심히 읽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금세 잊는다.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입사원이 되기 위한 면접에서 동일한 질문을 받았던 적이 있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 대답은 대충 이랬다.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하지만 모든 길을 가볼 수는 없다.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이 갔던 길을 가보지 않고 경험하기 위함이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비슷한 생각이다. 하지만 여행에서 지나온 길을 다시 기억하지 못하는 행보에도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읽고 보는 모든 것이 그랬다. 분명 읽었던 글이고 봤던 영화였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떨 때는 같은 책을 다시 읽는 중에야 전에 읽었던 책이구나 깨닫기도 한다. 가끔씩 글을 쓰기 위해 내용을 떠올리고 어디서 봤었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몇 년 전, 심지어 십 년도 넘게 지난 시절에 읽었던 내용들을 기억하고 술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분명 읽는 순간엔 충실했는데 말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책 읽기를 멀리 했다. 그러다 올해 들어서 다시 조금씩 책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욕심 없이 한 달에 한 권. 이 조차도 습관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쉽지 않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래서 책의 선정 기준은 무조건 읽기 쉬운 것 그리고 얇은 것이었다.


그러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집 '깊이에의 강요'를 고르게 됐다. 어떻게 처음 알게 됐는지는 역시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디선가 우연히 보고 관심이 생겼고 유명 작가의 단편소설에 무엇보다 얇디얇은 두께가 맘에 들어 선택한 책이다.


그리고 우연히 이 책에서 오랫동안 품었던 의문에 어느 정도의 위안을 삼을 수 있는 핑곗거리(?)를 찾았다. 아마 작가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그 경험을 단편집의 마지막에 에세이로 실어 놓았다. 바로 '문학의 건망증'이다.


작가는 책을 읽다가 아주 멋들어진 문장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연스레 메모를 남기기 위해 연필을 옮기는 순간, 이미 동일한 필체로 동일한 내용이 적혀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렇다. 스스로 오래전 같은 책을 읽고 남겨놓은 메모였다. 그러면서 작가 또한 수많은 책을 읽었지만 책의 제목이나 내용, 심지어 이처럼 읽었다는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읽는다는 것에 대한 회의감을 갖는다.

그 순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비탄이 나를 사로잡는다. 문학의 건망증, 문학적으로 기억력이 완전히 감퇴하는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그러자 깨달으려는 모든 노력 아니 모든 노력 그 자체가 헛되다는 데서 오는 체념의 파고가 휘몰아친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대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책을 한 번 더 읽는단 말인가? 모든 것이 무(無)로 와해되어 버린다면, 대관절 무엇 때문에 무슨 일인가를 한단 말인가? 어쨌든 언젠가는 죽는다면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일까?


그렇게 한동안 회의에 빠져 있던 작가는 결국 위안이 되는 아주 그럴듯한 생각을 내놓는다.

(인생에서처럼) 책을 읽을 때에도 인생 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도 있다. 의식 깊이 빨려 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은 핑계가 아닌가 하는 왠지 모를 찜찜함은 금세 숨어버리고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 더구나 아무나가 아닌 유명 작가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에 큰 안도감이 들었다.


물론 기억하고 되새길 수 있다면 좋다. 잊는다는 것이 좋다거나 당연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핑계라고 칭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지만 기억이 필수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어찌 보면 잊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작가의 말처럼 비록 기억은 하지 못하더라도 그 순간의 감동과 느낌, 생각은 아주 천천히 나를 변화시킨다.


여행의 본질은 가능한 지구 상에 많은 발자국을 남기기 위해서도 항상 새로운 곳을 가기 위해 지나온 길을 기억하는데도 있지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행을 하는 그 순간에 있다. 하지만 그 순간을 잘 받아들이기 위해 당연하게도 이전의 경험들은 매우 많은 도움이 된다.


읽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억하기 위해 읽는 것은 아니다. 읽는다는 것 자체, 읽고 있는 그 순간에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순간들이 쌓여 다음 읽기의 밑거름이 된다.


이러한 것들이 결국은 자리 합리화 또는 자기 위안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쨌든 이로써 읽기 위한 훌륭한 핑계가 만들어졌다. 그러니 비록 책 장을 덮는 순간 잊어버릴지언정 계속해서 읽어보자. 난 그렇게 서서히 변해갈 테니.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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