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을 만날 때에는 여러 조건들을 붙이면 편합니다. 돈이나 능력, 외모처럼 단일한 지표를 통해 자신의 분수에 맞는 사람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노을 진 어스름한 창가에 혼자 앉아 위스키를 마신다거나 비 오는 날 카페에서 롤랑 바르트를 읽는 뭔가 '측정하기 까다로운' 모습에 사람은 '끌림'을 느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놀랍지만, 이는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허세 가득해 보이거나, 눈총을 받을 만한 행동도 '저런, 정말 못 봐줄 인간이구만'하며 외면하지 못하고 그 의미를 헤아리려 하며 특별하게만 보일 때가 있는 법입니다.
하고많은 곤충 중에서도 왜 유독 나비를 무서워하는지, 통기타는 어쩌다 다룰 수 있게 된 건지, 친절함이 그토록 익숙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괜스레 묻고 싶어지고 맙니다.
사람은 '모르지만 알고 싶은 것'에 매력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들은 도통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데 혼자서만 괜히 신경이 쓰이고, 그 사람이 궁금해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사랑은 이래서 문제입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알고 싶다는 마음은 분명합니다. 마치 생경한 학문에 갑자기 의욕이 솟구쳐 학구열을 불태우듯 그 사람의 언어를 배우려 주저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두기만 하면 편할 텐데 말입니다. '측정'하기만 하면 더 이상 골치 아픈 일이 없을 텐데 말입니다.
그리스어로 철학을 뜻하는 '필로소피아(philosophia)'라는 단어는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앎'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것이 철학에 대한 하나의 본질인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사람이 '이성을 대하는 태도'와 철학에서 '지혜를 대하는 태도'가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스스로에게서 비롯되는 '앎'에 대한 지향성이란 '알면 더 좋을 것 같다'라는 흐릿하면서도 감상적인 태도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더 좋을 것 같다'라는 말에는 근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 안에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알면 더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는 확신이 선구적인 현실성을 갖게 되면 이는 정말로 현실화되어 자신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렇게 어찌어찌 변화하다 보니 만들어진 무언가에 근거와 의미가 사후적으로 따라붙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 '모르지만 관심이 없는 것'은 자신의 신체에 역동적인 변화를 체현시키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모르지만 알고 싶은 것'은 자신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뒤바꿔 버리는 게 가능합니다.
그런 '뒤바뀜'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사람은 전력을 다해 몰입해야 할 테고, 몰입하는 대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여타 철학이나 학문에서 학자들이 견지하는 성찰적 자세와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모습이 제법 비슷해 보이지 않습니까. 표준과 근거를 새롭게 하는 일종의 '도약'이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여기서 쉽게 놓치게 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근거를 새롭게 만들어 간다는 것은 학문적 활동 자체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사랑 자체에서 발현된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사랑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아무 이유도 없는 것들에게 새로운 이유를 덧붙이는 작업이니까요.
즉, '모르지만 알고 싶다'라는 마음의 양태는 '새로운 근거를 내가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라는 자못 '아무 근거 없음'을 스스로가 고백하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근거는 없습니다만, 그러한 '근거 없음', '무지'의 고백들만이 학문이든 사랑이든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