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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시락 Jun 23. 2016

독일과 터키, 그리고 아르메니아 학살

지구촌 이야기<9>

* 세상의 어제와 오늘을 담은 역사 매거진


최근 독일과 터키 사이에 101년 전 일어났던 '아르메니아 학살'과 관련한 외교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독일 정부는 터키에게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한 역사적 시인과 책임을 요구했으나 이에 대해 터키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있었던 나치의 만행을 예로 들어, '너나 잘해!' 라는 메시지를 보내며 불쾌해 했습니다. 사실 이번 사건은 단순히 과거 역사 때문만이 아니라 터키를 통해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건너오려는 난민을 터키 정부가 봉쇄한 데에 따른 독일의 외교적 압박이었죠.

101년 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자행되었던
아르메니아 학살

아르메니아 학살은 과거 터키의 전신이었던 오스만 투르크가 저질렀던 인종 학살을 가리킵니다. 1894∼96년과 1915~16에 벌어졌던 두 차례의 학살 중 일반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벌어졌던 학살을 가리킵니다. 첫 번째는 1877년 러시아-오스만 투르크 간에 전쟁이 발발하고 러시아가 아르메니아 인들의 거주지를 점령하자, 1894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 하에 살아왔던 소수 민족 아르메니아 인들이 러시아를 지지하며 독립을 요구했을 때 벌어진 학살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학살 또한 '러시아-오스만 투르크-아르메니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러시아가 속한 연합국에 맞서기 위해 동맹국에 가담하였는데, 이때 아르메니아 인들이 오스만 투르크를 공격했습니다. 이때 오스만 투르크는 또 다른 반란을 방지하고자 아르메니아 인들을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지로 강제 이주시켰고, 그 과정에서 고의적으로 추위나 굶주림 또는 질병으로 죽게 하는 등의 대학살을 자행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아르메니아 인들은 끈질기게 저항하여 1918년 마침내 독립을 선포하였죠.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은 아르메니아를 터키에 통합시키려 했고 이에 반발한 아르메니아 인들은 1920년 러시아로 편입하였습니다. 아르메니아는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비로소 독립국이 될 수 있었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국이었던 독일이 아르메니아 인들에 대한 오스만 투르크의 학살을 몰랐을 리는 없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당시 독일 정부가 아르메니아 학살을 묵인하였다고 볼 수 있죠.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현재의 외교적 문제 해결에 활용하는
독일 정부의 대처가 놀라워

과거의 역사적 잘못을 뉘우친 독일 정부는 대단하고 그렇지 못한 터키 정부가 못났다는 평가를 하자는 의도로 이번 사건을 조명해 본 것은 아닙니다. 난민들을 구제하는 데 동참하지 않는 터키에게 과거의 학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이번 사태에도 똑같이 대처할 거냐고 되묻는 독일 정부의 대처가 스마트해 보였기 때문이죠.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외교적 갈등 해결에 활용하는 독일 정부의 명민함이 돋보였고, 이와는 너무 대조적인 한국 정부의 행보가 갑갑할 따름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승전국들은 전후 국제질서의 재확립을 위해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파리강화회의'라고 일컬어지는 이 회의는, 미국 대통령 윌슨이 1918년에 제창한 '14개조 원칙'을 채택하고 국제연맹의 창설에 합의하는 등 겉으로는 매우 평화로운 분위기로 진행되었지만, 실제로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3대 대국의 이권을 우선시한 회의였습니다. 또한 패전국에 대한 과중한 배상금과 다른 국가들에 대한 적절치 못한 조치로 인해 많은 불만을 일으켜 제2차 세계대전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 [세계사, 왜?] 중에서

*블로그 바스락(홈피)

https://www.basol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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