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기억, 여행의 기억
이 여행기는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글로 된 여행기이고 다른 하나는 여행기를 담은 영상이다. 일종의 로드 무비지. 글로 된 여행기는 존재론적 성찰이 깃들어 있고, 영상은 존재론적 즐거움이 스며들어 있다. 이질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이성과 감정을 둘 다 가졌다는 확인에 불과하다. 이제 여행이 시작된다. - 읽고 보니 현학적이다.
1.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게 인생인 것처럼 여행도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게 여행의 이유인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불안함을 그 누가 감당하겠는가. 그래서 갈 테지. 그 불안 너머를 보고 싶어.
꽤 오래된 기억 중 하나인데, 문득 문득 떠오르는 여행이 있다. 대개의 여행들이 아주 짧은 순간들의 단편만을 남기기 마련인데, (그래서 사람들은 사진으로 남기기도 하지만) 이 여행은 시작부터 끝까지 여러 부분들이 남아있다. 그리곤 내 의도와 상관없이 어느 날 어느 순간 몇 가지 이미지가 내 눈 앞을 스쳐지날 때가 있다.
아주 즐거운 여행도, 슬픈 마음으로 떠난 여행도 아니었지만. 어쩌면, 아니, 분명히 더 안 좋은 상황에서 떠났을 것이다. 안 좋은 상황이 너무나 오래 지속되어 반쯤은 포기하고 반쯤은 억울해 하며, 조금은 나아지려나, 그렇다면 언제쯤 나아지려나, 그런 생각들을 할 시기였으니까.
통영으로의 여행. 통영이 좋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랬다면 통영. 이라며 마침표를 찍었을 테지만 그곳에서의 순간들이 생생하게 남아있다는 데에 더 큰 의의가 있지. 물론 통영은 분명 여행의 장소로 훌륭한 곳임은 틀림없다. 그 다도해의 바다를 찬양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테니.
육지에서 한참 떨어진 소매물도로 향하는 길. 동이 터오르는 동 트는 아침의 햇살을 받으며 배가 나아갔다. 1시간이 넘는 긴 항해. 정확한 시간은 아니지만 꽤 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지루할 틈 없는 순간의 연속. 기억엔 작은 왜곡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그 왜곡이 낭만을 만들어 내지.
갑판 위에 자리 잡았다. 팔짱 꼭 낀 팔로 몸을 감싸안아야 할 만큼 쌀쌀했으나 바닷바람의 찬 기운을 다 받아가며 앉아 있었다. 치기어리게 이 추위와 맞서보겠단 마음보단 광활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어느 곳에서 불어오는지 모를 스스로 날 느끼고 싶었다.
배멀미나 하지 않을까 했지만 배는 무사히 작은 포구에 정박했다. 이내 커다랗고 긴 통로에 휩쓸린 사람들이 파도처럼 덮쳤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사람들의 행렬. 배를 꼭 타야겠다는 의지의 그 힘찬 발걸음. 기다리는 것을 손에 넣게 되는 순간에 켜지는 그 영악한 눈빛들.
삶을 지속시켜 나가려는 생의 욕구란 차라리 짐승에 가깝다. 짐승에 가깝다고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은 착각이다. 인간의 영역이란 그렇게 본능적인 생존의 욕구 위에 문화적 욕망을 덧씌우는 일. 더러는 법과 도덕으로 그것에 굴레를 매다는 일. 그 세속의 다리를 지나면 그 너머에 인간이 접하지 않는 낯선 세계가 펼쳐진다.
그것은 인간 너머에 실존하는 그 무엇이라기보다도 인간 내면에 실재하는 의식의 산물이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을 찾아볼 수 없는 지구상에 새로운 땅을 밟는 일은, 이제 인간의 몸에 달린 두 발이 아니라 인간의 머리에 달린 감각들일 테니.
두 개로 이루어진 섬. 하나의 섬을 지나 또 다른 섬으로 건너가야 만날 수 있는 등대. 바닷길을 지나야 한다는 사실을 갈 땐 몰랐다. 그리고 그 길이 열린다 해도 하루에 두 번뿐인 배 시간을 맞추기 어렵다는 사실도. 3-40분 정도 걸어여 다다를 수 있으니까. 게다가 바닷길이 새벽에 열릴 수도 있으므로.
대개는 1박 2일 일정을 잡아야 가능한 일이라 들었다. 천운인지 모르나 그곳을 건너갈 수 있었지. 조류가 멈춰야 건널 수 있는, 한 달에 며칠 열리지 않는 시간이 허락된 것이다. 등대가 보이는 섬 앞에서 2-30분 정도 기다리다 보니 이내 썰물이 되어 바닷물이 스르륵 몸을 갈랐다. 자갈과 모래 사이로 빠져들어가는 그 소리란. 이런 광경을 보는 것도 드문 일.
건넌다고 특별할 게 있진 않겠지만. (자주 그런 생각으로 살아가지만.) 이곳까지 왔으니 한 번 저곳까지 가 보는 것. 무심히 계단을 올라 하얀 등대를 한 바퀴 돌아왔다. 온 길을 되돌아 가야 했기에 시간이 촉박했던 것도 이유지만. 온 길을 돌아 지나온 광경들을 하나, 하나 눈에 밟았다. 조금 더 머물 걸 그랬나. 아쉬움이 남기에 진해지는 추억.
섬을 빠져나오는 길은 처음만은 못했다. 아침의 신비도 저 멀리 떨어진 섬이란 궁금증도 사라졌기 때문이겠지. 다시 가 볼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어쩌면, 확실히 그럴 예감. 다만 예감은 예감에 그치기 마련이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난 또 얼마나 오래 고민하고 미적거릴지 모르기에. 그럼에도 난 그런 나와 잘 지내지. 조우한지 오래니까.
배가 부두에 정박하자 사람들이 배 속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나 역시 불가항력으로 밀려나욌다. 어쩔 수 없이 나 또한 그 사람들의 일부, 그리고 한 인간. 조금 다르고자 해도 다를 순 없겠지. 그렇지만 조금 다르기 위해 애쓰며 살아간다. 그것이 나이고 그 나를 느끼기 위해 오늘도 그 행렬에서 반 발짝 비껴 서 있기 때문이다.
다시 일상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해야 할 시간. 인간은 여행을 떠나지만 인간에게 여행은 떠나보낼 수 없는 무수한 일상을 견디는 것인지도 모르지.
통영의 어느 오후에 난, 서성이고 있었다.
2.
'통영에서 소매물도까지' 영상 여행기 *바스락tv
https://tv.kakao.com/v/421211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