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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솔 Feb 09. 2020

(시사회 리뷰) 문신을 한 신부님_얀 코마사

21세기판 마녀사냥

이 글은 영화 <문신을 한 신부님> 시사회를 다녀와서 쓴 리뷰이다. 약간의 줄거리에 해당하는 스포일러가 있으나 이 영화는 줄거리를 안다 해도 영화를 관람하는 데엔 큰 지장이 없을 것이다. 반전보다도 주제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 영화라 보기 때문이다. 리뷰 역시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크게 봐서는 위선이고 작게는 권력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어 사는 곳엔 언제나 위선과 권력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물론 누구나 위선 대신 자기의 순수함을, 권력 대신 평등한 관계를 앞세우겠지만 그 뒤에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저 추측해 보거나 그냥 믿는 수밖엔 없다. 진짜 마음을 아는 건 오직 본인 뿐이다. 때론 인간은 스스로 거짓말을 하는 것조차 합리화하거나 어느 순간엔 자신의 거짓말을 참말이라 믿는 존재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밝히고 싶어하는 것 또한 인간이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터놓지 않고서는 갑갑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대나무숲 이야기’는 그저 나온 것이 아니다. 가톨릭에서 대나무숲은 고해성사의 시간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회개 역시 하나의 ‘선택’으로 볼 수도 있다. 그 죄의 중요성이나 무게감이 문제가 아니라 그 죄가 왠지 자꾸만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그 죄가 아무리 가볍고 하찮다 하더라도 그것을 먼저 꺼내놓지 않을까.


인간의 심리는 단순하지 않고 인간의 삶도 딱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렵다.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서 교통 사고가 있었다. 사고를 낸 차량의 운전자를 포함하여 총 7명이 죽었다. 하지만 그 마을에서는 6명만을 추모하고 있었다. 사고를 낸 차랑의 운전자는 ‘공식적으로’ 추모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운전자의 부인은 집밖으로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죄인 취급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청소년 6명을 죽인 죄인. 한 마디로 ‘마녀 사냥’이었다.


이 마녀 사냥을 단죄하러 이곳에 온 사람은 하나님이거나 하나님이 보낸 사제가 아니었다. 물론 사제이긴 하나 정식 사제가 아니었고, 사제이긴 하나 문신을 한 신부님이었다. 범죄를 저질러 소년원에 갇혀있던 다니엘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 바로 신부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과가 있는 사람은 신부가 될 수 없었다. 어떤 관점에서는 수긍이 가나 어떤 관점에서는 수긍이 가지 않은 일이다. 다니엘에게도 마찬가지 아니였을까.


우연히, 정말로 우연이 겹쳐 다니엘은 그 작은 시골 마을에서 신부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여느 신부와 달랐지만 다른 신부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냈다.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좋은 신부님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차량 사고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벌인 마녀 사냥을 알게 된 다니엘은 그들의 위선을 폭로했다. 그들이 그들의 위선을 감출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다수였고, 그 다수의 힘으로 소수를 억압했기 때문이었다.


역설적이지만 마을 사람들의 치부를 드러낸 다니엘 역시 위선적이다. 사제복을 입는 순간 세상을 심판하러 온 사제 역할을 훌륭히 해냈지만 사제복을 입지 않았을 때의 그는 동네 양아치 짓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사기 행각은 밝혀지고 다니엘은 다시 소년원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다시 생존의 싸움과 마주해야 했다. 자신의 잘못을 숨기고 타인의 치부를 드러내며, 자신이 살기 위해 타인을 파멸해야 하는 인간 존재. <문신을 한 신부님>은 21세기판 마녀사냥의 재해석이 아닐까.


영화, 퍼올리다 - 김바솔

^엮인 글 : 주디_루퍼트 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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