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가치는 내가 말해줄게요. 부디 들어주세요.
[※이 글은 사람에 따라 다소 불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약하신 분들은 이 글을 피해 주세요.
혹은 이 글의 주제인 희망을 발견하기 전에 약간 잔인할 수 있는 내용들만 보고 세상을 냉담함으로 바라보실 것 같은 분들도 이 글을 피해 주세요. 당신의 평안한 마음을 방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 어려운 주제를 꺼내 들었다. '나'.
하루도 빼먹지 않고 고민한 주제지만 여전히 어렵기만한 그 주제.
기어코 이 주제를 꺼내든 건, 최근 세상을 등진 스물다섯의 연예인 때문이다.
문빈이 떠나기 전날 나는 급하게 한 가지 기도를 했다. 내가 섬기는 교회 공동체 안에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생각을 바꿔주시고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단단한 믿음을 달라는 기도였다.
문빈 때문에 이 기도를 한 건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기도 하루 만에 문빈의 안타까운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마음이 착잡했다. 자기 생명을 스스로 단념할 만큼 그를 괴롭게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우발적 행동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기 생명을 우발적으로 던질 만큼 냉담한 사람은 없다.
나 역시 질긴 자살충동에 신음했던 적이 있다. 자살을 묵상하는 것이 잔인한 자기 학대라는 걸 알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왼쪽 팔목엔 자기 학대의 흔적이 옅게 남았다.
나의 경우는 '무가치함' 때문에 긴 시간 자살을 생각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가치를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안쓰럽고, 안타깝고, 짠하긴 한데 나는 나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아니 사랑할 수 없었다. 사랑할 구석이 없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 관심은 온통 '나'뿐인데도 나는 내 가치는 찾을 수 없었다. 나를 관찰할수록 사랑할 수 없는 이유들을 발견했다.
못생겼고, 뚱뚱하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명석한 두뇌도 없고, 성격도 모났고, 사람들에게 무한정 사랑받는 캐릭터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랑받을 가치가 충분한 사람으로 나를 바꿔갈 능력도, 끈기도, 오기도, 치열함도 없었다. 무쓸모, 무가치 함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매일 나를 관찰하며 나의 무가치함을 떠올리고 되새기는데 버틸 재간이 있을까?
무엇이든 꾸준히 하면 전문가가 된다. 그렇담 나는 우울과 자기 학대 전문가였다.
내가 매일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낸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나는 자기 저주에 익숙했다.
나를 학대하고 비방하는 시간 외엔 정신없이 일을 하거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일 중독도 우울증의 한 단면이다) 지나다니며 자살 방법을 공상하며 지냈다. 예를 들어 횡단보도 앞에 서있는데 대형 버스가 지나간다면 이런 생각을 했다. '저 버스에 치이면 몇 미터를 날아가고, 몇 리터의 피를 쏟아서 죽게 될까?'
한강을 보면 이런 식이다. '높은 데서 뛰어들면 충격보다 심장마비로 먼저 죽는다는데, 한강에 뛰어들면 충격으로 죽을까 심장마비로 죽을까?'
아름다운 풍경도 죽음으로,
타인의 행복도 죽음으로,
평범한 일상도 죽음으로 이어지는 나의 삶은 지옥이었다. 울지 않은 밤이 내겐 특별한 날이었다.
정체성이나 자아를 찾을 수 있다고 선전하는 책만 책장 한 면을 채울 만큼은 읽었다.
그런 책들은 한동안은 도움이 됐다. 책을 정독하고 내게서 긍정적인 것을 발견할 때면 세상이 다 환해진 듯했다. 출근하는 발걸음도 달랐다. '그래! 나는 소중한 사람이지! 난 멋진 사람이야.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과거의 긍정적인 기억들을 싹싹 긁어모아 억지 자존감을 만들었다. 초등학교 때 말하기 대회에서 1등 한 기억까지 다 긁어왔다. 하지만 길어도 한 주였다.
세상은 끊임없이 내가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지, 무기력한 존재인지를 직면시켰다.
상사로부터 '어릴 때 부모님이 독서 교육은 시켰냐는 말'을 들을 때,
아래위로 내가 입은 것, 걸친 것들을 스캔하는 사람들을 볼 때,
나보다 재능 많은 사람들을 볼 때,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그늘 없이 자라 언제나 당당해 보이는 것 같은 사람을 볼 때,
나는 무한정 쪼그라들었다. 원망과 분노가 자라났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원망과 분노를 하면 안 된다는 율법에 속박되어 그 모든 감정들을 슬픔으로 환원시켰다. 분노는 죄지만, 슬픔은 긍휼함을 얻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대학 교육에 지금은 대학원 교육까지 받고 있지만 인간은 어떤 면에서 무지 그 자체다.
나의 영혼은 이미 시들었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던 중에 예수를 만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선물을 하나 받았다. 집단 상담을 받을 기회가 열린 것이다.
가장 존경하는 멘토로부터 집단 상담을 받을 기회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집단 상담을 받으며 처음으로 나의 심각한 상태를 직면하게 됐다.
그때 처음으로 사람이라고 누구나 자살을 생각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자살이라는 걸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는 걸 알게됐다.
그 이후로 나는 나의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받아들이고 치유의 여정을 시작했다.
고생스러웠다. 월급의 3분의 2를 상담을 받는데 써야 했고, 내게 주어진 시간의 절반 이상은 나의 상처의 원인을 찾고 이해하는데 써야 했다. 집단상담과 개인상담, 스스로 상담 책을 읽고 공부하는 시간까지, 일주일에 적어도 3~4일 이상은 치유를 위해 시간을 쓰는 생활을 6년 이상했다.
그리고 완전한 치유는 7년째 되는 올해 얻게 됐다.
완전한 치유를 일으킨 결정적 한 방은 '예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 관련한 흔한 강해 설교 중 하나가 이것이다. '예수를 찾으면 나를 발견한다.'
이 구절은 나를 부인하고 나는 이미 죽었다고 선언하는 글인데, 이 문장에 '내' '나' 자아를 가리키는 말이 7번 나온다. 나는 이 말씀이 이해가 안 됐다. 이 말씀은 내게 이해는 안 가지만 외우고는 있는 어떤 수학공식 같았다. 하지만 완전한 치유를 경험하며 나는 이 말씀을 외우지 않고 이해하게 되었다. 원리는 너무 간단했다.
예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왕이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다. 가장 완전한 평안이다. 그 안에 무가치함은 없다. 그 안에 어둠은 없다. 그런데 그가 내 안에 산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내 안에는 영원한 아름다움, 영원한 사랑, 영원한 평안인 그 가치가 산다. 예수의 가치가 곧 내 가치다.
내 안에 사는 예수 때문에 나는 빛이 난다.
내 안에 사는 예수 때문에 나는 아름답다.
내 안에 사는 예수 때문에 사람들은 나의 가치를 알아본다.
나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사는 예수를 알아본다.
그런데 그 영원한 가치를 나는 '믿기만 하면' 즉시 얻게 된다.
이 얼마나 눈물 나는 소식인가?
이 가치는 '얻어 내는'게 아니다. 그냥 선물로 '받으면' 된다.
예수를 내 안에 초청하는 순간 나는 그 즉시로 무가치에서 벗어난다.
나는 요즘 하루하루가 즐겁다. 행복하다.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 몰랐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이렇게 외치며 일어났다. "하나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너무 괴롭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
그런데 이젠 이렇게 일어난다.
"하나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제 눈앞에 어떤 상황이 펼쳐지든 주님이 함께 계심을 잊지 않게 해 주세요. 어떤 상황이 생기든 내 영혼은 주 안에서 안전합니다."
나는 오늘도 내 안에서 반짝이는 예수를 발견한다.
기대가 된다. 오늘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를 발견해 줄 사람은 누구일까?
오늘 나의 반짝이는 가치를 발견해 줄 사람은 누구일까?
더는 내 가치를 물을 필요가 없다. 내 정체성을 찾을 이유도, 내 자아를 찾을 이유도 없다.
내 안엔 이미 영원한 가치인 분이 살고 있다. 예수의 가치만큼이 내 가치다.
예수의 가치가 얼마냐고? 예수는 만왕의 왕이시다. 유일하게 죽음을 정복한 분이다.
사랑 때문에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 선한 목자다. 이것이 당신 안에 살게 될 예수다.
당신의 가치를 미리 단정 짓지 마라.
당신의 가치는 예수의 가치만큼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아멘.
당신의 가치는 예수가 보장하고, 내가 보장한다. 그러니 제발 오늘도 살았으면 좋겠다.
부디 죽지 말고 사는 쪽으로 걷길 정말 기도한다.
그리고 정말 전심으로 당신에게 해가 없길,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난만 찾아오길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