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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날 Apr 27. 2021

왼팔의 쓸모

난 오른팔에 텀블러, 전공책 등으로 찬 무거운 숄더백을 걸치고 지하철 환승 계단을 걸으며 가끔 왼팔은 인간 평생에 오른팔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을 덜하겠구나 복받은 녀석 역시 세상은 불공평을 기반으로 하지 류의 자잘한 생각을 하곤 했었는데 아기를 낳고서야 왼팔의 새로운 역할을 알게 되었다.  


 아기를 안을 때 주로 왼팔로 안고 있게 되는데 그건 오른손으로 동시에 다양한 일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분유먹이기, 침닦기, 장난감흔들기, 과일썰기 등) 나의 왼팔은 13킬로를 육박한 에너지 넘치는 나의 아기를 때로는 십여분, 때로는 한번의 쉼없이 한시간도 넘게 안으며 성실히 일하고 있다. 생긴지 만 36년만에 상당히 혹독하며 고된 업무를 예고도 없이 갑작스래 수행하느라 크고 작은 통증에 자주 시달리는, 그러나 반나절의 휴가도 내줄 수 없는 내 왼팔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요즘이다.  


 난 특히나 남보다 팔이 많이 길어 원숭이과 아니냐, 유비 후손이냐(삼국지에서 유비에 대한 외모를 “키는 칠척오촌, 두 귀는 어깨까지 늘어뜨려지고, 두 팔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간다.”고 묘사하고 있더랜다. 괴물도 아니고.) 하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어왔다. 팔만 긴건 아니고 손가락도 최선을 다해 자라서 팔 길이에 한 몫한다. 너무 길어 전체적인 밸런스가 어색해 보이고 춤을 춰도 회수하는데 오랜시간이 걸리는 거추장한 긴팔의 무쓸모를 나보다도 긴 팔을 가진 여동생과 자주 논의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 역시 아기를 낳고 나니 얼마나 유용한지. 아기를 한 팔로 안고 엉덩이를 바닥에서 떼지 못한 채로 집어야 하고 써야하는 물품의 수와 그 사용횟수는 가히 언급이 어려울 정도로 많은데 내 가제트 팔이 쭉쭉 뻗어가 저 멀리 있는 물티슈를, 선반위 가제수건을, 소파 깊숙이의 쪽쪽이를 기특하게도 잘도 집어온다. 아 저건 좀 안될 것 같은데 하는 거리도 갈비뼈와 옆구리까지 최대로 확장하면 왠만하면 손 끝에 어찌어찌 닿아 획득해 온다. 물리적 법칙을 굴절시키는 내 팔길이에 종종 진심으로 놀란다.


 가끔은 발가락까지 동원된다. 오른손엔 뚜껑이 열린 아기주스병이, 왼손엔 내 어깨에 그 주스를 토하고 있는 아기가 있다면 1미터 근방 가재수건을 공수해 올 도구는 내 서툰 발가락 뿐이다. 발가락이 더럽고 말고를 따질 때가 아닌 순간은 원치 않게도 무수하다. 어렸을 때 TV에서 방영하던 미래소년 코난 만화영화를 참 재밌게 봤는데 발가락으로 헬리콥터에도 매달리고 무기잡고 싸우기도 하고 하길래 어머 웃기다 대단해 했는데 20년 후 내 발가락 이야기 인줄 몰랐다. 내 손가락 만큼이나 평균치를 많이 웃도는 내 발가락은 서 있을 땐 바닥의 장난감을 움켜잡아 힘껏 던져 오른손으로 캐치해 아이의 손에 다시 장난감을 쥐어주게 하며 작은 웃음을 회수하게 해 준다. 물론 가끔 쥐가 날 때도 있지만 조금 더 엄마력이 쌓이면 쥐가 문제랴.


 아기를 낳고 기르느라 바쁜 나의 몸아, 잘 돌봐주지 못하는데도 그저 성실한 나의 몸아, 오늘도 오버워킹 시켜서 미안하고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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