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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날 Apr 30. 2021

어느 약사 이야기

#. 남 이야기 - 1

그는 약사였다. 병원이 없는 도시와 시골 그 사이에 차린 약국은 그 마을의 유일한 약국이자 병원이나 다름없었다. 처방을 할 수는 없지만 시판약을 처방을 하듯 팔았다. 동네에는 몸이 자주 아픈 어르신들이 많았고 약국의 경영자이자 유일한 약사이며 직원인 그의 약국은 평일도 주말도 없이 손님이 있었다. 인삼 농사를 주로 하는 그 마을엔 흙묻은 손에 그을린 얼굴을 했지만 현금이 넉넉한 노인들이 주로 살았다. 약국의 수입은 넉넉 정도를 넘어 수직으로 상승했다. 그는 타고나길 어릴적부터 숫기가 없고 소심한 편이었어. 몸도 왜소하고 목소리도 작았고 어딘지 모르게 여성스러운 느낌이 있어 남자아이들에게도 얕잡히는 일이 일상이었다. 그나마 부모님의 외동아들에 대한 부담스런 기대에 어찌어찌 끌려오다 보니 이 자리에 섰다. 이제 사람들은 날 얕잡아 보지 못한다. 우리 약사님 약사님 하며 동네 어르신들은 서로 자기 딸을 소개시켜주고 싶어 안달이었다. 


학창시절 딱 한번 연애라고 칭할 만한 걸 해봤는데 사실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여자아이와 만났다. 어영부영 연애한번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모솔이라는 딱지로 또 얕잡힐 거리를 만들 것 같아 대학에 복학 후 두학기째에 급히 서둘렀다. 이 정도면 나와 어느정도 이질감 없는 수준의 – 수준의 외모, 성격, 키, 교양, 전공 이지 않을까 해서 못나지는 않았으나 예쁘지 않은 적당히 무난한 아이를 골라 사귀었다. 그 정도 적당히 7개월간 남들 해볼 것 어느 정도 해보고 헤어졌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심심찮게 들어오는 선에 때로는 어디서 연락처를 알았는지 결혼정보회사에서도 전화가 왔다. 늘 첫 호칭은 약사님-이었다. 모르는 전화에는 늘상 이유없이 긴장하는데 그 호칭이 들리는 순간 어깨를 세우고 여유있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사진을 먼저 받아보고 여자쪽의 전신 사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키가 크고 글래머러스한 여자를 좋아했다.) 소개팅이 지속되며 필요를 느껴 몰던 소나타를 처분하고 벤츠 E클래스를 하나 뽑았다. 그렇게 꽤 많은 횟수의 소개 자리에 나갔고 때로는 여자쪽에서 적극적으로 맘에 들어 했고 때로는 그의 호감이 더 앞서기도 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실제 진지한 만남으로 이어지는 확률은 낮은 편이었다. 소심한 성격의 그는 적극적인 여자에게 끌렸다. 하지만 너무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하는 여자는 그의 날로 상승하는 재산에 무임승차가 목표인 것 같아 거부감이 들었고 그가 맘에 드는 여자에게는 적극적으로 대시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다가 흐지부지 되었다. 몇 번 안되지만 연인 관계로 이어지기도 했다. 아니 연인관계라 할 수 있을까? 가령 이런식이었다. 


 - 첫 번째 만남 후 그의 소심한 성격상 통상 여자쪽에서 적극적인 호감을 표명할 때 두 번째 만남이 가능해진다. 두 번째 만남에 영화관에 간다. 콜라 하나와 팝콘 대사이즈 콤보세트를 시켜 어둑한 자리에 앉는다. 어색한 몸짓으로 빨대 두 개를 꽂고 조심스래 두 빨래를 구분하려 각도를 벌리고 있는 그에게 그녀가 속삭인다. 그냥 한 개로 먹으면 되지 않아요? 그리고 여자 몫의 빨대를 휙 빼서 바닥에 버린뒤 그가 한번 입을 댄 빨대로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태연히 스크린을 본다. 그는 그 순간에 이 여자와 잘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영화관을 나와 커피숍에 간다. 약국 운영하는데 힘들지 않으시냐고 손님도 많을텐데 혼자서. 라는 여자의 말. 손님 많냐니 이거 운영 잘되는지 안되는지 떠보는거 아닌가. 혼자서 하니까 힘들텐데 자기가 안주인으로 들어서서 계산이나 해주겠다는 심보 아닐까. 지방 전문대에서 강사를 하고 있는 여자는 학생들 가르치는게 적성에 잘 맞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역시나였나. 내 약국이 한창 잘되고 있다는거, 확장하려고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는 것도 뚜쟁이에게 다 들었을터였다. 주차장에서 각자의 차로 헤어져 배웅하는 길 처음본 그녀의 자가용은 폭스바겐 골프였다. 물론 나의 벤츠 E클래스에는 못미치지만 지방대 교수도 아니고 시간강사를 하면서 외제차를 끄는게 맞나? 과한 씀씀이와 허세가 있는지도 모른다. 아까 커피값은 제가, 하며 가방에서 꺼내던 작은 갈색 지갑에 명품 로고가 있었던 것도 같다. 이 여자는 내가 맘에드는걸까 내 재산과 사업이 맘에 드는걸까. 불안하고 왠지 모를 잔잔한 분노를 가지고 남자는 돌아온다. 선뜻 연락이 먼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냥 이렇게 넘기기엔 이야기도 꽤나 잘 통했고 여자는 박사 학위도 있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키도 컸다. 처음으로 손을 잡았던 세 번째 만남은 3주 후 성사됐고 여자가 남자의 볼에 짧은 키스를 했던 네 번째 만남은 그로부터 5주 후 성사됐다. 다섯 번째 만남은 없었다. 


 그렇게 수십번의 소개자리와 몇 번의 짧은 인연이 지나가는 사이 어느덧 남자는 노총각이라는 타이틀을 달만한 나이가 되었다. 꾸준한 운동과 영양제 섭취, 위생 관리로 잔병도 잘 없었지만 머리숱이 확연히 줄어 탈모약을 처방받았다. 같이 약대를 졸업한 친구들의 자녀가 초등학교 6학년이라 조만간 중학교에 간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직은 괜찮다. 약국은 직원도 한명 뽑고 안정적이며 사이즈를 확장해 의료건강기기 등도 같이 팔았는데 지역 노인들에게 반응도 좋다. 친구의 권유로 꾸준히 참여한지 8년째인 지역 맛집 동호회 표방한 사교 모임은 대게 미혼 남녀가 친교와 연애 그 중간의 케미컬을 뿜으며 운영되는데, 이제 그곳에서도 나이가 좀 많이 든 축이라 좀 머쓱할 때도 있지만 요즘은 워낙 결혼들을 늦게 해서 올드 멤버가 많으니 그렇게 염려할 정도는 아니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야 뭐 얼마나 가졌다고 시골 약사주제에, 라는 동창의 말에 화가 나 자리를 박차고 나온 후 그 주말에 6년 탄 벤츠를 새 모델로 바꿨다. 초등학교 교사와 결혼해 아이가 둘인 그 동창의 이름을 핸드폰에서 지워버렸다. 이번 주말엔 백화점 명품 화장품 코너에서 매니저 생활을 오래 했다는, 키가 170센티에 아주 호리호리 하다는 여자쪽과 선자리가 있다. 여자쪽 나이가 다소 많은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사회생활을 바닥부터 오래 해서 올라왔기 때문에 생활력도 있고 성실하다는 뚜쟁이의 말이 썩 마음에 든다. 이번엔 나의 타이틀이나 돈이 아니라 나 자신을 봐줄 진솔한 여성이 나올지도 모른다.  난 아직 괜찮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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