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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날 May 25. 2021

담담함의 단단함

육아 휴직을 끝내고 복직을 한 뒤, 나의 세 살 아가도 엄마처럼 새로운 어린이집에 적응의 시간을 가졌다. 어린이집도 바뀌었지만 어린이집에서 머무는 시간도 부쩍 늘어났다. 기존에 3시 반이면 엄마 품에 안겼던 하원 시간이 나의 퇴근 후인 6시 반으로 늦춰졌다.


퇴근 후 엉덩이에 불붙은 듯 부랴부랴 어린이집으로 발걸음을 재촉 해 교실 앞에 가보면, 교실 창문 넘어 어쩔 땐 두어 명, 대개는 혼자 선생님과 조용히 앉아 자동차, 블록 따위를 쥐고 놀고 있다. 집에선 엉덩이 한번 땅에 댈 일 없이 뛰어 노는 지라 그 차분한 모습이 엄마의 마음을 흔든다. 또래 아이들이 북적거리는 시간은 서로 장난감을 차지하고 새로운 놀잇감을 선점하느라 아이도 정신없이 가리라. 하지만 하나둘씩 엄마, 아빠, 조부모가 찾아와 다정한 손길로 친구들을 데리고 사라지면 그 공백 속에 우리 아가의 마음은 어떨까. 혹시 문가만 바라보며 내 얼굴이 빠꼼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느라 선생님 음성엔 그저 건성이 아닐까. 쓸쓸하거나 울적해져서 25개월을 만진 애착이불을 쥐고 마음을 달래는건 아닐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나면 궁금한 게 많아진다. 아직 자기 마음이나 상태를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연령대의 아이일 때는 더 그렇다.


그날도 교실 앞엔 우리 아이 가방만 하나 덩그러니 남았다. 엄마를 보고 아이는 기쁨에 어쩔줄 모르고 팔짝거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과 함께 복도에서 슬라이딩을 선보인다. 늘 계시는 깐깐하고 연륜깊은 담임선생님이 아닌 오후에만 아이를 돌봐주시는 연장 보육 선생님이 아이의 옷가지를 건네주신다. 아이의 축축하고 먼지 묻은 발에 양말을 신기며 그간 마음엔 묵직하고 입에선 차 넘쳤던 질문이 나도 모르게 조심스레 입밖으로 나왔다. 저희 아기 저녁에 친구들 가면 좀 쓸쓸하거나 울적해 하진 않나요? 일이초 생각하다 무심한 듯 담백하게 나온 한마디의 대답. 그냥 담담해요.


아뇨 어머니 너무 잘 놀고요 씩씩해요! 라는 대답보다 날 안심시켰던 그 말. 친구가 다 엄마와 손잡고 나가는데 높은 텐션을 유지하며 씩씩한 아기는 드물다. 아기이기 전에 사람이니까 따뜻하고 다정한 내가 있을 품을 기다리는 것을. 담담하다 하여 그 상황이 그저 즐겁지는 않으리. 하지만 고통스러움을 뜻하지도 않는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많은 질문을 던지지 않은 채 잔잔한 시선으로 그렇구나, 하는 거겠지.


얼마 전 쉽지 않은 임신으로 여러차례의 인공 수정의 실패를 거쳐 시험관 시술 날짜를 잡아둔 친구가 생각난다. 주변 사람들이 마주칠 때 마다 힘들어 어쩌냐고, 힘 내라고, 안타까워 어쩔줄 모르며 위로의 말을 고르는 데 막상 친구의 가족인 남편, 친정 부모님과 시부모님은 아 우리 딸이 이번에 인공수정을 했는데 안됐구나, 그럼 좋은 것 먹고 쉬며 다시 시도 해봐야겠구나. 우리 며느리가 이번에는 시험관 시술하는데 이번엔 잘 될 수 있으니 한번 해보지 뭐, 하는 정도의- 마치 아파트 청약 당첨이 아차 이번에 물먹었네 다음에 다시 도전! 하듯 – 잔잔한 반응을 보여준다고 했다. 계속되는 실패에 당사자가 많이 지칠 만도 한데, 이처럼 가족들의 태도가 담백하다 보니 그래서 오히려 본인도 담담한 마음으로 크게 흔들리지 않고 각 과정에 임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호들갑 떨지 않는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일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친구는 지금 임신 7주차다)


어린이집 교실 앞 아이는 안가고 뭐하냐는 듯 ‘엄마 빨리! 뽀로로 쥬스!’ 라고 외치며 까불거리는 발걸음으로 날 재촉한다. 그래, 엄마가 왔으면, 이제 된거다.


업다운을 피할 수 없는 매일의 삶. 그 속에서 내 자리에 고이 앉아 오늘도 살아가게 하는 담담함은 참으로 단단함을, 나는 나의 25개월 아이에게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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