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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날 May 25. 2021

안녕하세요 나의 전 남자친구

내 첫 직장은 백화점 영업관리였다. 치열한 취업 전쟁을 거쳐 꿈의 마케터라고 들어갔건만 신입사원은 2년간 영업점에서 현장을 배워야 한대서 칼정장을 입고 구두를 신은채 종일 뭣도 모르고 매장을 돌며 브랜드에 매출이 왜 이렇게 안나오냐 행사 상품 준비한게 이게 뭐냐 하며 꿍시렁 대는게 일이었다. (세상에, 어쩜 그렇게 나와 격하게 안 맞는 일을 했는지 13년이 지나도 기가차다.) 당시 내가 있던 영업점은 ‘고객은 왕이다’를 넘어 ‘고객은 신이다’를 직원들의 마음에 새기려 했는지 걸어가며 마주치는 말그대로 모든 고객에게 인사를 하게 했었다. 두걸음 걸어 꾸벅, 한걸음 걸어 꾸벅, 급한 일로 사무실에 바쁘게 가야할 땐 마치 마라토너끼리 달리며 인사하듯 매장을 뛰며 스치는 불특정 다수에게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라고 경쾌히 부르짖었더랬다. (와 다시 생각나도 정말 안 맞았다.)


그날도 전투복을 입고 신입사원의 고단함을 안고 매장을 어슬렁 거리고 있는데 저 앞에서 20대 중반의 커플이 다가왔다. 어..어? 하다가 1미터 전방에서 커플 중 남자가 내 공식적인 첫 남자친구이었자 선배였던 사람이란 걸 깨달았고 나도 모르게 안녕하세요! 라고 외쳤다. 물론 서비스 매뉴얼 대로 했을 뿐이나 당황한 나머지 얼굴을 너무 빤히 쳐다보며 면전에 바짝 대고 했을 뿐이고, 유독 텐션 높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을 뿐이고 걸어가다 뒤를 돌아봐서 역시나 뒤를 돌아본 그 남자와 눈을 마주쳤을 뿐이고 그러다 보니 옆의 여자친구와의 짧은 대화도 들렸을 뿐이다. 


- 오빠 아는 사람이야? 

- 아, 아니? 


와 거기서 발랄하게 안녕하세요가 뭐냐 하며 짜증이 나는 동시에 상황이 웃겨서, 그리고 왠지 모르게 통쾌해서 좀 없어 보였던 것도 같아서 등등 온갖 감정으로 간지러웠던 그 3층 영캐주얼 파트의 어린 영업관리자에서 시간은 거슬러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었다. 출산 후 기나긴 동굴같은 시간을 뒤로 한 채 조심스럽게 시도한 첫 자유부인 날이었을 것이다. 몸이 아직 정상이 아닌지라 꾸며도 태가 안났지만 난 첫 세상으로의 정상 복귀라는 마음으로 설렘 가득 가장 예쁜 옷과 좋은 가방을 입고 들고 화장도 좀 했더랬다. 늘상 가던 서점에 가서 책을 둘러보고 있는데 아 저기, 익숙한 자리에서 익숙한 남자가 책을 보고 있었다. 남편을 만나기 직전에 만났던 전 남자친구 였다. 새로운 사람 잘 만나서 결혼 이야기 나온다는건 둘러둘러 알고 있었다. (나 없이는 사직서 내고 폐인으로 살겠다더니.)  이날 옷을 잘 정비하고 나온게 얼마나 다행인지 하나님께 한번 감사기도를 드리고는 무슨 심정이었는지 괜히 근처 유아 책 코너에 가서 직원에게 큰 소리로 OO 육아서적 어디있느냐고 물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이었다.) 그러고도 약한 것 같아서 주변을 얼씬 거리며 아직 뒤집지도 못하는 아기의 퍼즐 장난감 따위를 오래 만지작 거렸다. 그가 날 봤는지 못 봤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감정은 무엇인가. 띠끌하나 남지 않아서 공허한 그 관계에 무엇이 남았길래 난 전 남자친구(들)에게 당황을 안기고 싶은가. 백화점에서는 의도치 않게 당황을 안겼지만 그것이 주는 알수 없는 통쾌함은 엉덩이가 간질간질 했다. 서점에서는 성공여부는 알수 없지만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한때는 수도 없이 불러서 닳아 버릴 것 같던 이름마저 잘 기억이 안나서 스스로 놀라웠던 그들을 (서점남은 성씨만 기억났다) 내 지루한 일상 그저 스쳐갈 한순간의 짜릿한 즐거움의 먹이로 소비하고픈 가벼운 심정이라니. 실제로 내 술안주로 심심찮게 사용되고 있음을 고백한다.


때론 친구보다 가족보다 가까웠던, 이제는 친구도 될 수 없는, 마주치면 인사하는 앞 동 지역주민보다 못한, 님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만 찍으면 남이라는 가사는 괜히 대중의 심금을 울린게 아니다. 관계여, 어찌나 부질없고 그토록 허무한가. 연애가 끝난 후 남는 건 그가 아니라 그가 선물한 그 시절의 나다. 내가 선물한 그의 그 시절이 그에게 맘에 들었든지 말았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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