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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날 Jun 28. 2021

황폐함이 주는 선물

통영 바다가 변했다

지난 겨울 마지막으로 다녀왔던 통영에 시부모님을 모시고 다녀왔다. 통영은 우리 3인 가족에겐 마치 갈 곳 없으면 들르는 별장과도 같아서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계절에 한번씩은 다녀오는 여행지다. 그곳만의 둥그렇고 오르막 내리막한 지형, 나지막하고 조금씩 부식되어 있는 건물들, 구도심 항구의 적당히 북적이고 생활감 있는 느낌, 그리고 싱싱하고 푸짐한 바다 상차림을 사랑한다.


작년 연말 날도 춥고 감염병으로 분위기도 싸늘하던 어느 날, 복직 전 여행이라며 꾸역꾸역 아기짐 보따리 끌고 갔었더랬다. 여기저기 식당부터 공원까지 코로나로 문을 걸어 잠군 판에 비까지 내려 노선 정하기 어렵기도 했고, 기본으로 돌아가 보자며 통영의 대표 관광상품인 케이블카를 타고 미륵산 전망대에 올랐다.


그 무렵 내 마음은 황폐했다. 마음도 공기도 얼어붙었다. 복직을 앞두고 워킹맘 돌입에 대한 걱정, 동시에 아이와 곧 오래 붙어 있을 수 없다는 불안함, 승진시험에 떨어져 날이 선 동시에 축 쳐져 있었던 남편의 상황, 덕분에 더할나위 없이 뾰족뾰족 하던 남편과의 관계, 바닥을 쳤던 육아 스트레스, 어떻게 꾸며도 초라해 보이던 푸석한 내 모습- 그 황폐함 속에 찾았던 전망대에서 바라본 통영 바다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푸른 바다과 둥근 섬들의 불규칙적인 능선이 시리면서 동시에 따뜻했고 내 뾰족하고 날이 선 신경을 감싸왔다. 남편과 아이가 계단으로 이어진 샛길에 다녀와 본다며 잠시 옆을 비웠던 때 계단에 앉아 바라보던 그 바다의 시간은 나에게 ‘이 심연 앞에 별거 아냐. 힘 좀 빼, 괜찮아’ 라고 말해주는 듯 했다.


무언의 위로가 있던 그곳의 그 푸른 광경과 개운함을 전달해 드리고 싶어 자신있게 부모님을 모시고 케이블을 탔던건데, 아, 뭐지? 뭔가 변했다. 전망대를 오르는 계단길 옆 풍경도 조악하게 느껴지고 땀 흘려 오른 전망대도 너무 좁고, 무엇보다 당황스러웠던 건 눈앞에 펼쳐진 바다였다. 여전히 푸르고 광활했지만 그냥 평범한 바다 풍경이었다. 반년 사이 뭐가 변했지? 아니 변했을 리가 있나 그것도 바다가. 변한 건 나였다. 내가 이제 살만해진 것이다.


살만한 지금. 회사는 적응을 마치고 그 언제나처럼 다니고 있고 심지어 여유가 생겼으며 걱정했던 아기의 어린이집 적응도 끝났다. 남편도 새로운 조직에서 상황이 나아져 활력을 되찾았으며 자연히 부부사이도 조금은 회복되었다. 늘 피곤한 걸 넘어 통증을 느끼던 내 웃자란 몸도 전보다 뜸하게 아프고 매일 출근하고 활발히 움직이다 보니 피곤은 해도 얼굴에 활력이 돌았다. 요즘 괜찮아? 라고 누군가 물으면 푸념거리와 스트레스 요소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지만, 내 마음은 더 이상 그때만큼 황폐하지 않았다.


간절함과 황량함은 작은 것도 위로가 되게 하고 아픔이 되게 한다. 바람 한줄기가 창이 되기도 하고 꽃 한 송이가 한약 한 첩이 되기도 하는. 살만 할 땐 잘 들어오지 않던 무딘 감각들이 예민하게 곤두서게 해서 더 살아있을 수 없을 만큼 살아있게 만드는, 마음속 가난함. 그 황량함이 겨울바다를 바라보던 내 마음의 감각들을 깨우고 감동을 극대화해 주었겠지. 작은것에도 의미와 희망을 부여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전쟁과 점령, 빈곤과 어둠의 시기에 예술가들의 혼이 더욱 치열하게 꿈틀댔던 증거가 많은 작품으로 남아있다. 삶과 사랑에 대한 깊은 고찰로 치열한 정식적 고뇌를 호흡처럼 가지고 살았던 천재 예술가들이 유독 강렬한 작품을 남기기도 한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은 작가라 할 수도 없는 글쓰기가 작은 취미인 나라는 사람도 배부르고 등 따시면 딱히 글 쓰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인생 더럽고 내 속이 시끄러울 때 일기라도 토닥토닥 쓰고 싶어지는 건 나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예전에 프로이트에서 출발된 정신분석학 이론이자 심리학 검사인 방어기제 검사를 동아리 친구들과 해보고 전문가의 설명을 들은 적이 있는데, 방어기제 중 하나인 ‘승화’는 개인의 위험해 보이는 감정을 사회적으로 수용가능한 형태로 바꿔서 표출하는 것이며, 방어기제의 가장 성숙한 형태라고 했다. 대표적으로 예술을 들 수 있다. 이런 것 만 보아도, 만족과 평안이 가지는 에너지와는 또 다른 의미로, 절망과 고통이 가진 에너지 역시 매우 저력있어 보인다.


일부러 절망의 상황에 내 몸을 던질 필요야 없겠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삶은 불공평을 기본값으로 하되, 그 속에서 밸런스를 늘 저울질 하는 측정 현장 같다. 좋기만 할 수도 나쁘기만 할 수도 없는 매 순간들이 펼쳐진다.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 사는 건 어느정도 비슷한지 모든 구름 뒤엔 은빛 면이 있다, 비온뒤 땅이 굳는다, 고진감래.. 많은 속담들이 원래 다 그런거야, 라고 한다. 오늘 이 세상 바닥에 뚝 떨어진 듯 힘겨운 순간에 아스팔트의 들꽃하나, 씩씩한 아기 들고양이, 누군가가 건넨 초콜렛 한조각, 이런 작은 요소들에 그저 감사하다며 웃을 수는 없겠지만, 그런 작은 감동 딱히 못 느껴도 좋으니 내 상황 좀 좋아졌으면 싶은건 당연지사이지만- 무너지는 순간에 그냥 이거라도 잡아보자고. 아 나 살아있긴 한가보다, 더 살아있을 수 없을 만큼 살아서 이렇게 꿈틀대고 있나보다 하고 생각해 보자고. 그렇게 좀 살만해 져서 다소 무뎌진 감각의 내가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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