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30년 직장을 정년퇴직하고 많이 흔들렸다. 젊은 나이에 입사해서 한 회사만 다닌 후 정년을 채우고 퇴직한 아빠는 국민연금조차 받으려면 멀은, 고작 56세였다. 퇴직 1년 전부터 퇴직 후 3년 여의, 그 4년정도의 아빠의 시간과 그로 인한 우리 가족의 상처는 풀어놓기가 힘들다.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짜증이 나고 화가 나서 내 기억이 그때를 피해버린 것 마냥 기억이 흐릿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몇 가지 너무 강렬한 기억은 내 가슴에 아직 완전히 아물지 못한 생채기를 남겼기 때문이다.
아빠는 퇴직 후에도 집에서 회사 생활 하듯 권위적으로 굴었다. 거주하는 도시가 달라 어쩌다 함께하는 식탁에서 ‘아빠는 더 이상 지점장이 아니라구요. 우리는 부하 직원이 아니고!’ 라고 속으로 백번도 더 외쳤다. ‘솔직히 그렇게 엄청난 직장도 아니었어, 무슨 착각을 하는거에요?’ 라고 아빠에게 문자 보내는 꿈을 꿈 적도 있다.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높은 직위를 여기서라도 누려야겠다는 듯이, 나는 아직 건재하다는 듯이 빈정을 건드리는 원초적인 권위를 가족들을 상대로 쏟아냈다. 물 가져와. 커피 가져와라. 조용한 식탁에 아빠의 알아 들으려면 네가 귀를 기울여라 식의 작고 대충 밷어내는 짧은 명령어만 몇 개 떠다녔다. 가벼운 농담이나 의도없는 한마디에도 지금 나를 무시하는거냐고 화산처럼 폭발했다. 전혀 예상치도, 그래서 대처할 수도 없는 아빠의 반응에 가족들은 모인 자리에서 말수를 잃어갔다. 가족들 중 그나마 아빠에게 할 말 하고 살았던 나는 (어릴적 나의 두 동생들은 나를 ‘삼남매의 목소리’라고 칭했다.) 멀리 살아 자주 못 봤기에 참았지 아니었으면 이미 아빠와 척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집에 사는 엄마와 남동생, 인근에 거주하는 여동생의 고통에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아빠의 아픔에 공감하고 안타까웠던 마음은 아빠가 그를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던지는 칼날같은 상처와 숨도 못쉬게 하는 긴장감이 오래 지속되며 모두 증발해 버렸다가도 다시금 가슴이 아팠다. 아빠는 누구나 그렇듯 좋은 아빠기도 아쉬운 아빠기도 했지만 가장의 책임에 늘 충실했고 우리 남매의 일에 관심이 많았으며 꽤 다정한 아빠축에 속했다. 우리 모두는 그 시절의 아빠를 떠올리며 견뎠다. 그때의 아빠는 많이 아팠던 것 같다.
그 무렵 아빠를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다. 난 그때 집 근처 예식장에서 있던 지인의 결혼식에 늦어 정신없이 걷고 있던 참이었다. 사람이 미어지게 많은 범계사거리에서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아빠는 깔끔한 세미정장을 차려 입고 계셨다. 그 당시 아빠의 유일한 외출이자 세상과의 가느다란 끈 같았던 동네 헬스장에 다녀오고 계시던 길이었으리라. 5분 거리의 헬스장 외출에도 좋은 옷을 갖춰 입고 걷는 아빠는 당신의 흔들리는 자존심과 자존감을 꽉 움켜잡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듯 너무나 연약해 보였다.
분주한 거리 속 멀리서도 알 수 있는 그날의 아빠의 눈은 마치 사진처럼 내 마음에 남아있다. 젊은 시절부터 유명했던 총기가 넘쳐 남들이 오래 쳐다보기 힘들 정도였다는 그 눈은 여전히 부리부리했지만 조금 충혈되고 어딘지 황망했다. 어색하고 짧은 대화 후 각자의 길을 걸어가며 아빠를 안쓰러워 하지 않기로 했었지. 지금의 이 위태로운 아빠가 밉지만, 힘들지만, 그를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빠가 아빠 자신과 벌이고 있는 싸움에서 아빠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봐 초라하게 만들지 않는 것. 아빠를 전혀 초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아빤 자랑스러운 우리 아빠라고, 그런 말로 되려 그를 못견디게 하지 않는 것. 최대한 무덤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기다려 주자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나는 조금 울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