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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비 Nov 26. 2023

무제

즐거운 편지

너는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 걸까. 

네 생각이 날 때면, 아무 많이 생각이 날 때면 나는 아무런 대책없이 마음이 아플 뿐이다. 

외로움과는 사뭇 다른, 그저 보고 싶다,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무척이나 알고싶다는 지금으로썬 해결할 수 없고 충족할 수 없는 아픔이다. 그저 나는 그 아픔과 마주할 뿐이다. 아픔을 느끼고 견디는 것. 그 외에 방법이 없다.


너가 생각이 날 때면 나는 아직도 우리가 걸었던 거리에 간다.

너는 내 옆에 이제 없지만 그래도 나는 그 거리에 대책없이 가본다. 혹시라도 마주칠까.

우연히 마주친다면 인사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어쩌다 실루엣이 비슷한 사람이 나타나면 오히려 그것이 두려울 따름이다.

마주칠까 두려워 일부러 네가 교회에 가있는 시간대에 그 거리를 홀로 걷는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기에 너와의 기억도 흐릿해져간다. 어쩌다 기억이 난 그 장소에 간다. 너와 함께 앉아 미래를 그려보았던 그 카페 그 자리에 간다. 너는 내 곁에 없고 나 혼자 앉아있을 따름이다. 너와 같이 앉아있던 그 자리, 왜이렇게 돈을 많이 썼냐며 타박하던 네 목소리가 빈 공간에서 생생하게 피어오른다. 너와 함께 올랐던 동산에 간다. 너가 사는 집 뒷편으로 십 수분만 올라가면 나오는 조망명소. 아무나 데려오지 않는 자신만의 비밀장소라고 한다. 동네 사람이 아니라면 알기 어렵기는 하겠다. 흔들의자에 앉아 잠시 쉰다. 네가 보고싶다. 나는 다시 동산을 내려간다. 내려가며 무심코 네가 사는 집을 바라본다. 어쩌면 우리는 가까이 있을 지도 모르는데 만날 수는 없다. 이곳에서 너를 불러보고 싶다. 하지만 합의된 만남이 아니면 그저 나는 불청객일 따름일 것이다.


나는 알 수 없다. 네가 아직도 나를 생각할 지.

내 생각이 절절히 났다면 벌써 연락하고도 남았겠지. 최악의 남자로 다시는 상종하기 싫은 최악의 남자로 남아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벌써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타지에 가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 편이 나을 지도 모르겠다. 너는 나를 잊은지 오래일 것이다. 나도 너를 이제는 완전히 잊고 싶다.




내가 당신을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자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즐거운 편지, 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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