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하고 성실한 정석의 모험
무력하고 성실한 정석의 모험
디지몬 어드벤처에 나오는 선택받은 아이들은 각자 맡고 있는 문장이 있는데 일행 중 맏형인 정석은 성실의 문장의 소유자다. 성실의 문장의 주인답게 정석은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며 항상 한쪽 옆구리에 정석 책을 끼고 다닌다. 정석은 언제나 맏형으로서, 리더로서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행동한다.
정석의 성실은 정해진 루틴을 충실히 수행해내는 부지런함과는 성질이 조금 다르다. 정석의 성실은 맡은 역할에 대한 책임감에 가깝다. 연장자로서, 일행의 리더로서 도망치지 않고 책임을 다하려 애쓴다. 디지몬 어드벤처 오리지널 버전에서는 리키를 반드시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신 물에 빠지자 성실의 문장이 각성해 원뿔몬이 쥬드몬으로 초진화했고 리부트 버전에서는 프리지몬의 공격을 받아 몸이 점점 얼어붙고 있는 소라가 치료할 시간을 벌기 위해 리더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혈혈단신 맘몬과 프리지몬에 맞서기로 결단하자 성실의 문장이 반응해 쥬드몬으로 초진화를 했다.
그러니까 나는 선택받은 아이들 중 정석이 가장 좋다. 아무도 그에게 연장자와 리더로서 책임을 묻지 않지만 그는 스스로 정한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가끔씩 헛발질처럼 보여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 좋다.
사실 정석은 그렇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캐릭터는 아니다. 오리지널 버전에서 쉬라몬은 절대 완전체로 진화하지도 않고 성실의 문장은 희망의 문장이나 빛이 문장처럼 특별한 힘이 있어 누군가에게 새로운 힘을 더해주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쥬드몬이 다른 완전체 디지몬보다 특별히 강한 것도 아니다. 선택받은 아이들의 실질적인 리더는 태일이며 한솔이처럼 디지털 기기에 능숙해 일행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지도 못한다. 정석은 약하다. 그의 파트너 디지몬인 쉬라몬은 물고기 행진이라는 기술을 쓰는데 그건 그냥 작은 물고기를 여러 마리 불러내는 기술이다. 디지몬 어드벤처 오리지널 버전 첫 화에서 아이들을 습격한 쿠가몬에게 대응할 때 다른 디지몬은 모두 자신의 필살기로 공격한 반면 쉬라몬은 혼자 몸통 박치기로 공격했다. 물고기 행진에는 별 다른 살상력이 없다.
위기가 닥쳤을 때 정석에게는 상황을 타개할 만한 능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석은 약하고, 정석은 똑똑하지도 않다. 이러한 사실을 그가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는 ‘나는 할 수 없어’ 같은 말을 한다. 무서워하고 어쩔 줄 몰라한다.
그렇지만 도망치지는 않는다. 그는 연장자로서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석에게 그것은 자신이 책임이다. 그는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려 한다. 자신이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실제로도 할 수 없다. 할 수 없지만 해야 하기 때문에 한다. 어린 리키를 위해 대신 바다에 빠지거나 강마저 얼려버릴 정도로 강력한 맘몬을 혼자 상대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어릴 때는 아이들을 훈계하고 강하지도 않고 멋없는 기술만 쓰는 정석이 무척 별로라고 생각했다. 리키는 약하지만 그 자체로 희망이 되고 나리는 빛의 문장의 소유자답게 스스로 신비로운 힘을 냈지만 정석은 무력하기만 했다. 세련되지 않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정석이 좋아진 것은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다. 나 역시 숨겨진 특별한 힘 같은 건 없는 무력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다 버리고 도망치거나 어떻게 어떻게 겨우겨우 마주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주로 도망치고 가끔 마주했다. 도망치지 않는다는 건 그 자체로 엄청난 결단이었다. 어른이 되어 다시 보니 도망치지 않는 정석이 너무나 대단해 보였다.
예전에는 정석이 약해서 싫었지만 이제는 정석이 약해서 좋다. 정석에게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었다면 정석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사람이 해내는 것뿐이니까. 정석은 약하고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가지 않는 그의 성실함이.
정석은 눈을 질끈 감고 맞이해야 할 위기를 기꺼이 맞이한다. 나는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라 성실하고 무력한 정석의 모험이 좋다. 비록 쉬라몬은 끽해야 물고기 행진 같은 기술을 쓰겠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