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 아는 슬픔들
<2> 우리만 아는 슬픔들
어쩌면 우리가 질지도 몰라
고글을 벗으며 그 애가 말했다
어느새 해가 저물고 이것으로 우리의 하루는 끝난다
언제까지 싸워야 하는지 같은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누구도 그렇게 하자고 직접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암묵적으로 그러기로 했다
내일은 내일의 싸움이 있을 테니까
교문 밖을 나서며 각자 집이 있는 방향으로 갈라지는 우리들
엄마 내가 세계를 구했어
그래 너는 무럭무럭 자라서 이다음에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엄마는 너를 믿어
<<계간 파란>> 2020년 겨울호에 실린 <우리만 아는 슬픔들> 중에서
위의 시는 지난겨울에 발표한 <우리만 아는 슬픔들>이라는 시다. ‘우리만 아는 슬픔들’은 파워디지몬(원제 디지몬 어드벤처 02)의 주제가 ‘타겟~붉은 충격’의 한글판 번안 곡에 나오는 구절이다.
재작년 여름에는 ‘이상한 나라의 폴’을 다시 봤다. 물론 옛날 애니메이션 특유의 과장되고 연극적인 연기가 적응이 안돼서 금방 그만뒀지만.
폴은 마왕에게 납치된 니나를 구하기 위해 이상한 세계로 모험을 떠난다. 그는 어른들에게 니나가 사악한 마왕에게 잡혀갔다 주장하지만 어른들은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실종된 니나를 찾기 위해 경찰까지 동원되고 폴은 경찰에게 사실을 말하지만 경찰들 역시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폴과 함께 여행을 떠난 돗페와 팟쿤은 현실세계에서는 그저 반려견과 봉제 인형일 뿐이다. 폴의 주장을 증명해줄 증인은 어디에도 없다. 폴의 모험은 오로지 폴만 아는 사실이다. 폴만 말할 수 있는 사실이다
디지털 세계를 모험하는 아이들의 모험도 그렇다. 어른들은 알 수 없는 신비한 세계. 그들이 겪은 일을 타인은 모른다. 그들만의 비밀. 세계를 지키기 위해 아이들이 벌이는 처절한 싸움은 그들만 아는 슬픔이 된다. 물론 어른들도 안다. 이 작고 연약한 아이들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는 사실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알지 못한다. 아이들이 누구와 만나고 누구와 헤어졌는지 까지는 알지 못한다.
처절한 사투는 알지만 처절한 사투가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블랙 워 그레이몬이 나타났을 때 느꼈을 절망감을 알지 못한다. 힘겨운 싸움을 마치고 새로 알게 된 디지몬의 희생으로 겨우 살아남았을 아이들의 슬픔을 알지 못한다. 처음으로 진짜 디지몬을 죽였을 때 아이들이 느꼈을 허무함과 두려움을 알지 못한다. 모험을 통해 아이들은 성장하지만 동시에 어른들과 간격이 생긴다. 모순되는 지점이다. 성장을 통해 어른에 더 가까워지지만 동시에 어른들과 멀어지는 아이들.
아이들이 말하는 슬픔이 어른들에게 전해질 때 그것은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까? 당장의 상실과 앞으로 이어질 불안을 말하는 아이와 그런 아이에게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대답하는 엄마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을까. 내가 나의 슬픔을 이야기할 때 당신에게 그 슬픔은 어떤 모습으로 닿을까. 결국 내가 아는 슬픔은 나만 아는 슬픔이고 당신이 아는 슬픔은 당신만 아는 슬픔이다.
‘힘겨운 싸움 우리만 아는 슬픔들 모두 이겨내고서 달려갈 테야’가 시의 제목이 된 ‘우리만 아는 슬픔들’이 들어간 구절 전체다. 이다음으로 후렴이 시작되는데 후렴 첫 부분 가사가 이렇다. ‘마음을 모아 헤쳐나가 그렇게 쉽지 않아도’. 싸움은 힘겹고 싸움을 통해 알게 되는 슬픔은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우리만 아는 슬픔이다. 하지만 마음을 모아 헤쳐나간다. 그렇게 쉽지 않아도.
그래 쉽지 않지만 하는 것이다. 할 수 있는 모든 진화를 마쳐도 적들은 더 강해져서 나타나겠지만 그래서 싸움을 끝없이 해야겠지만 내일은 내일의 싸움이 있겠지만 다들 그걸 알지만 굳이 말하지 않고 그냥 교문을 나가 헤어질 뿐이겠지만.
싸울수록 비밀이 늘어간다. 다 말해도 알아듣지 못할 테니까. 어둠의 에너지가 뭔지 엄마는 모르니까. 그래 봤자 내가 해야 하는 싸움이니까. 선택받은 아이는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