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프몬의 마음 2
임프몬의 마음 2
유대를 거부하고 끊어낼 것을 선언하고 베르제브몬으로 진화한 임프몬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아이들 앞에 나타나 그들을 공격하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사력을 다해 베르제브몬에 맞섰지만 이제 막 완전체로 진화한 파트너 디지몬으로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치열한 전투 끝에 주연의 파트너 디지몬인 레오몬이 베르제브몬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디지몬 테이머즈는 전작인 디지몬 어드벤처 시리즈보다 무거운 작품이다. 종반부에 적으로 나오는 데리퍼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디지몬 세계 설정부터가 약육강식의 면모를 잘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전작의 경우 디지몬은 죽으면 알이 되어 시작의 마을에서 다시 태어났지만 디지몬 테이머즈에서는 죽으면 데이터가 되어 죽인 디지몬에게 흡수된다. 그걸로 끝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레오몬도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힘을 다한 파닥몬과 추추몬은 알이 되어 다시 파트너와 만나지만 레오몬은 베르제브몬에게 살해당한 다음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레오몬의 죽음은 주연이의 트라우마를 일깨우고 그 트라우마가 씨앗이 되어 데리퍼가 움직이는 결과를 낳는다. 임프몬은 완전히 아이들과 적대 관계로 돌아선다. 주연이에 대한 죄책감을 가진 채로.
언젠가 작은 잘못을 저질러 괴로워하는 나에게 한 친구가 ‘자기 검열이 너무 심하다’는 말을 해준 적이 있었다. 잘못이라면 잘못이고 잘못이 아니라면 잘못이 아닐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잘못이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는 너무 큰 괴로움이었다. 나는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무해함에 집착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상대에게 유해한 행동을 했다는 생각이 들면 그날부터 며칠을 괴로워했다. 역시 나는 안되나 봐, 나는 진짜 못난 사람이다 라고 자책하면서 말이다.
나는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시비를 걸고, 조롱하고, 냉소적인 태도로 타인을 대했다. 의도치 않은 상처를 주지 않고 상처를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행동했다. 이렇게 말하면 기분 나쁘겠지 생각하며 좀 더 상대방이 기분 나쁠 만한 말을 던졌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외적인 약함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이것도 굳이 찾은 이유다. 나는 그냥 공격적인 사람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줬다. 나는 지금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에 대한 부채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도, 좋은 말로 위로하려는 것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려 하는 것도 모두 부채감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나는 좋게 말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고 냉소적이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점검한다. 덕분에 나는 상대가 내게 하는 것에는 둔감하지만 내가 발산하는 것들에는 예민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자주 실패하고 그래서 자주 괴로워하고 있다.
레오몬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베르제브몬은 크리사리몬 떼의 공격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당해주다가 다시 임프몬으로 퇴화한다.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 더 이상 힘 같은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임프몬이 다시 베르제브몬으로 진화한 것은 데리퍼에게 붙잡힌 주연이를 구하고 그에게 속죄하기 위함이었다. 진이와 가영이의 응원을 받은 임프몬은 베르제브몬에서 한 단계 더 강해진 베르제브몬 블라스터 모드로 진화한다. 유대를 통해 임프몬은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베르제브몬은 데리퍼에게 고전하고 있는 디지몬들 앞에 나타나 ‘구하러 왔다’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 래피드몬은 ’너의 말은 믿을 수 없다’ 말하고 그는 ‘믿든 안 믿든 상관없다. 주연이를 구하면 그만이다’라고 대답한다.
베르제브몬은 아이들에게 자신이 속죄하고 있다는 걸 인정받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주연이를 구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그는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데리퍼에게 의식을 지배당한 주연이를 깨우는 데 성공한다.
나는 구해야 할 사람도, 상대해야 할 적도 없다. 부채감이 생겨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지만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건은 휘발되었고 내가 무언가 잘못을 했다는 죄책감만 남아있다. 나는 베르제브몬으로 진화할 수도 없어서 계속 나를 경계할 뿐이다. 가끔 말투나 성격에 대한 칭찬을 들으면 내가 잘 보이려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부채감을 인정받는 것 같아서,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