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들, 지나친 것들, 보게 될 것들

클레어 키건<이처럼 사소한 것들>, 바흐<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

by 새로운 고전

이 책에서 처음 본 문장이 묘사하는 풍경은

1985년 아일랜드의 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기도,

2024년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 삶이기도 한 장면들입니다.




'상점 주인, 기술자, 우편 업무를 보거나 실업 급여를 타려고 줄은 선 사람들,

우시장, 커피숍, 슈퍼마켓, 빙고 홀, 술집, 튀김 가게에 있는 사람들 모두

저마다 추위에 대해 또 비에 대해 한마디씩 하며

서로 이게 무슨 의미냐고ㅡ이 날씨가 어떤 조짐은 아니냐고ㅡ

아니 또 이렇게 매운 날이 닥칠 줄 누가 알았겠냐고 물었다.'




주인공 펄롱은 아내 아일린, 다섯 딸과 함께 살아갑니다.

야적장에서 석탄과 목재배달을 하며

넉넉하다고 할 순 없지만 내일을 위협받을 만큼

위태롭지는 않은 일상을 꾸려갑니다.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멀리 가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시내에서, 시 외곽에서 운 없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사람들 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고

전기요금을 내지 못해 창고보다도 추운 집에서 지내며

외투를 입고 자는 사람도 있었다.'




펄롱은 가사도우미로 일하던 중 임신했던 엄마를 보살펴준

미시스 윌슨의 도움으로 자라왔습니다.

그래서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을 무사히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장면을 목격합니다.

석탄 배달을 하러 간 날

수녀원 사람들, 동네 사람들 모두 쉬쉬했던 비밀입니다.




'수녀가 지폐를 세는 동안 펄롱은 수녀를 찬찬히 보았고

너무 오래 제멋대로 살아온 고집 센 조랑말을 떠올렸다.

여자아이에 관해 뭔가 묻고 싶었던 마음이 솟았다가 결국 사라졌고

펄롱은 그냥 수녀가 달라는 대로 영수증을 써주고 나왔다.'



"어쨌든 간에,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 딸들은 건강하게 잘 크고 있잖아?"

"우리 딸들? 이 얘기가 우리 딸들하고 무슨 상관이야?"

펄롱이 물었다.

"아무 상관 없지. 우리한테 무슨 책임이 있어?"

"그게,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당신 말을 듣다 보니 잘 모르겠네."




클레어키건의 문장은 은근하고 소소한 듯 하지만

한 장, 여러 장 넘겨질 때마다 모여 무시할 수 없는 정서를 던집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 펄롱이 어떤 마음을 지나고

어떤 모양의 선택을 하는지,

결정 뒤에는 어떤 마음이 남고 또 지나가는지,

따라가며 제 마음에 남겨졌던 문장을 나눕니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자기중심적인 내 매일에서 가장 천천히 알게 되는 것,

바쁜 세상에서 우리에게 낯선 일인 일에 대해 생각합니다.

타인을 통해서 새로워질 수 있다고,

앞날을 희망할 수 있는건 내 꿈과 욕망때문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살펴준 타인들 덕분이라고.


잡고 싶은, 놓친 것들을 생각하며 떠올린 곡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HMo23n1OXw



바흐의 칸타타 BWV 140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어> 입니다.

피아노로 편곡된 버전으로 소개드립니다.



이 책을 읽고 왜인지 괜히 이렇게 되뇌어 보았습니다.

쌓인 눈으로 덮인 발자국처럼 지워지더라도,

모든 건 언젠가 드러난다고.

금방 잊혀지는 것 같아도 소용 없는 일은 없다고.





*참고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다산북스, 2023

Bach Cantata BWV.140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

(Wachet auf, ruft uns die stim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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