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모노]

날렵하게 벼려진, 반짝이는 칼끝으로 재단한 이야기들

by 채부장
2025. 05. 03


성해나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은 건 작년 젊은작가상 작품집에서였다. 7편의 수작 중에서도 그녀의 작품이 기억에 또렷하게 남았던 것은 무엇보다 독특한 소재에 매혹당했기 때문이다. 그 때의 단편이 작가의 두번째 소설집과 동명인 것 역시 <혼모노>가 최근 그녀의 작품들을 대표하기 때문인 듯하다. 소설집 띠지에 배우 박정민의 추천사가 인용되어 있었는데, 꽤 책을 사고싶게 하는 문장이었다.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


맞다. 그의 말처럼 당장 영화나 드라마로 극화해도 좋을만큼 성해나 작가의 소설들은 흥미롭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주제를 찾아내지,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알고 풀어내지, 싶을 정도로 그녀의 소설에는 번쩍거리는 지점이 있다. (성해나 작가의 글은 ‘반짝’보다는 ‘번쩍’이 어울린다. 벼려진 칼 끝이 번쩍이며 빛나는 것처럼.) 몇 번을 감탄한 지점이 있었는데 이 글에서는 세 가지로 추려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처음으로 말하고 싶은 건, 마치 그 집단에 들어갔다 나온 듯 실감나는 묘사다. 첫번째로 실린 소설인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에서는 ‘김곤’이라는 예술 영화 감독의 팬덤을 그려내는데, 감독의 아동 배우 학대 논란 때문에 굉장히 축소되어버린 모임이다. 그만큼 농축되어 있고, 한편으로는 기형적인 팬클럽 속 세상이 날 것 그자체로 묘사된다. <우호적 감정>은 90년생 대표가 ‘실리콘밸리 병’에 걸렸다고 폄하당하는 스타트업 회사가 배경이다. 진, 수잔, 그리고 알렉스는 서로 다른 배경과 나이를 딛고서 좋은 동료가 될 뻔하지만 그것은 결국 요원한 일로 끝난다. <메탈>은 말 그대로 메탈 음악에 열광하는 세 명의 남고생들이 주인공이다. 사랑의 열광적인 시작과 초라한 끝처럼, 메탈을 중심에 둔 세 명의 열정과 우정은 점점 낡아간다.


작가 역시 어떤 감독의 팬클럽이었을까. 혹은 스타트업에 다녀본 경험이 있나. 학창 시절에 메탈에 열광했던 적이 있었나. 이런 의심이 들 정도로 성해나 작가가 다루는 배경과 소재는 폭 넓고, 또 자세하다. 동시에 현실과 크게 동떨어지지 않아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한다. 좋아하던 유명인이 논란에 휩싸여 가치관에 혼란을 겪었던 일, 동료와 가까워졌던 것 같다가도 그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놀랐던 일, 한 때는 없으면 못 살 것 같다고 여겼던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잊혀지는 일.


두 번째는 작가가 보여주는 사회, 그리고 역사에 대한 통찰이다. <스무드>를 읽고 소설의 전개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민 3세대인 주인공 ‘듀이’는 업무상 처음으로 방문한 서울에서 길을 잃고 종국엔 ‘타이극기’ 축제가 열리는 ‘이승만 광장’으로 초대된다. 한국에 대해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는 그녀에게 그것이 ‘아주 좋은 하루’로 남는다. 소설 속 듀이는 제프가 만든 ‘분노도 불안도 결핍도 없’고 ‘무엇을 비판하려고도 하지 않’는 매끈한 검은 구와 같다.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의 구보승은 어떠한가. 오로지 합리성과 실리를 추구하는 설계를 하는 그에게 ‘철저히 인간을 위한’ 건축이라는 말은 어딘가 고장난 사람의 변일 뿐이다. 구보승을 보며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루돌프 회스를 떠올린 사람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마땅히 느껴야 할 공포, 절망, 무력감을 주는 가장 효율적인 설계를 고민하는 사람, 그가 만든 건축물이 바로 ‘구의 집’이다.


소설에 빠져들어 작가가 만든 길을 속절 없이 따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그녀가 보여주고 싶어한 듯한 묘한 그림 앞에 마주서게 된다. 내 앞에 있는 건 광화문 광장 앞의 태극기 부대일 수도, 무시무시한 남영동 대공분실일 수도 있다. 처음부터 이 길을 예상하고 온 건 아니었는데 어느 새 종착점이다. 그녀가 나를 세워놓은 이 곳, 그들 사이에 서서 다시 한번 길을 반추한다.


궤를 같이 하는 이야기지만,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녀의 소설 속 결말에 대해서다. <혼모노>의 마지막 문장을 아래에 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큭큭, 큭큭큭큭.“


한물 간, 이미 신들이 떠나버린 중년의 박수가 초대받지 못한 굿판에서 굿을 벌이며 하는 마지막 대사다. 그가 하는 말인지, 그를 떠나간 할멈 신이 하는 말인지, 할멈 신이 옮겨 간 신애기가 하는 말인지 종잡을 수 없다. 다만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진짜’와 ‘가짜’에 대한 것임을, 이 문장을 곱씹어보며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성해나 소설의 결말은 명쾌하지 않다. 하지만 그 명쾌하지 않음이 더 진한 여운을 남긴다. <잉태기>의 결말에서 서진이 작게 읊조린 말은 무엇이었을까. 할아버지와 엄마의, 자신에 대한 지독한 사랑과 집착 사이에서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나 좀 내버려둬’일 수도 ‘둘 다 미쳤어‘일 수도. <우호적 감정>의 알렉스는 앞으로 어떤 회사 생활을 하게 될까. 항상 해맑고 열정 많던 그녀가 종국에는 깐깐하고 회의적이라고 평가받던 수잔처럼 변할지도, 혹은 누구보다 더 대기업 회사원다운 진처럼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주 희망적으로 상상해, 그 모든 사건과 사람들을 겪어내고 가장 알렉스다운 알렉스로 성장하길 바란다.


총 7편의 소설을 아주 몰입하며 읽었다. 신선한 소재와 뛰어난 묘사, 그리고 성해나 작가의 상상력에 여러 번 감탄했다. 과연 넷플릭스보다 재밌는 책이라니. 아직 읽지 못한 그녀의 소설집과 단편들, 그리고 앞으로 나올 책들이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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