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낙천적인 아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서울대생은 역시 똑똑하다

by 채부장
25. 9. 14


이번 8월 연휴엔 속초를 다녀왔다. 여행길에 그 지역 서점에 들러 책을 사오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인데, 책을 볼 때마다 당시의 추억이 곁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속초에는 ‘완벽한 날들’이라는 완벽한 서점이 있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었는데 갈 때마다 역시 좋다, 고 생각한다. ‘완벽한 날들’에는 당장 집어들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책들이 다양하게 큐레이션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은 책이 있었다. 라임 컬러 바탕에 누군가 끄적인 듯 장난스럽게 그려진 아이 얼굴. 무슨 책인가 궁금해 들여다보니 유튜브에서 가끔 쇼츠로 접했던 여성 코미디언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뭐야. 코미디언이 오늘의 젊은 작가라고? 호기심 반, 질투 반의 마음으로 책을 구매했다.


작가는 ‘원소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한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서울대, 여성, 코미디언, 작가, 거기에 페미니스트, 비건-이 두 가지 옵션은 책에서 그녀가 꽤 여러번 부인했으므로 아닐 수도, 혹은 맞을 수도-인 원소윤을 어찌 궁금해하지 않으리. 게다가 <꽤 낙천적인 아이>는 프롤로그부터 이미 나를 죽여놨다. 세례명 ‘마리아’인 소윤의 이상형은 슬렌더에 숱이 풍성하고 퍼포먼스에 능한 예수님이다. 웁스. 거기에 시몬, 필립, 요한 같은 열두 제자의 이름은 12인조 아이돌 같다는 것 아닌가. 여기에 오은영 박사님 이야기까지 더해 금쪽이 예수님으로 연결시키는 그녀의 재기발랄한 상상력이란. 그녀 생애 최초의 오픈마이크 무대, 그 방청석에 만약 내가 앉아있었다면 몇 번이나 경박하게 웃음을 터뜨렸을 지도 모르겠다.


오픈마이크 무대로 시작한 이 소설은 작가의 어린 시절로 연결된다. 다시 말해 <꽤 낙천적인 아이>는 원소윤의 자전적 소설, 오토 픽션이라는 이야기다. 할아버지인 치릴로, 할머니인 소피아, 엄마 로무알다, 아빠 로무알도, 그리고-어쩌면 두 명의-오빠, 소윤 마리아. 여덟 살의 원소윤이 지금의 원소윤으로 자라기까지 겪은 사랑과 고통, 고민과 위로가 담뿍 담겨있다. 얼핏 보면 우리 사는 이야기처럼 평범해보이지만 또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다. 왜냐, 그녀는 코미디언이니까. 똑같은 이야기도 한끝 다르게 비틀리고 그 끝에는 항상 유머가 묻어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도 엎질러진 물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몸을 앞으로 기울여 달리다가 확 쏟아져 버릴 듯했다. 아슬아슬한 심경으로 달리다 보면 나 자신이 가소롭기도 했다. 기만자, 난 진짜 기만자야. 치릴로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내가 그에게 되게 잘해 줄 것 같지 않은데 이렇게나 슬퍼한다는 게 같잖았다. 게다가 내가 아는 한 치릴로는 매일 무진장 심심해했다. 소형 카세트를 재생시켜 1,000곡의 노래를 듣고 또 듣는 것이 일상의 전부라고 말한 적 있었다. 약간 죽고 싶었을 수도 있어. 그런 생각에까지 다다르면 마음이 확실히 편해졌다.”


“50여 명이 함께 쓰는 고시원 세탁기로는 빨래를 해도 해도 냄새가 영 쿰쿰했다. 게다가 세탁기는 거의 공격적으로 느껴질 만큼 시끄러웠다. 능력은 없으면서 툴툴대기는 엄청 툴툴대는 하나의 인격체로 느껴질 지경. 그래서 이름을 붙여 주었다. 고탁기. 탁기야, 힘 좀 내봐. 탁기야, 너무 시끄럽게 굴진 말고. 탁기야, 탁기야. 심심찮게 그 이름을 불렀다.”


할아버지 치릴로의 죽음도, 고시원 세탁기의 소음도 사실은 엄청난 인생의 고통과 괴로움이 아닌가. 하지만 소윤은 여기저기 부딪히면서도 이 상황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그 모습을 따라가다보면 나는 어느새 그녀에게 빠져들어 있다. 그녀의 농담, 그녀의 유머가 마음 한 켠을 서글프게 강타한다. 원소윤이 업으로 ‘농담을 짜는’ 사람이라 그런 걸까. 소설은 찔끔 눈물 반, 피식 웃음 반이다. 이걸 어쩌나. 울다 웃으면 엉덩이에 털이 난다는데.


책을 다 읽고 유튜브에 원소윤을 검색해보았다. 고학력 농담, 고학력 찐따, 사이비 자취녀 등 몇 개의 쇼츠를 보고 ‘다정’과 ‘배려’에 대해 이야기하는 40분짜리 컨텐츠도 보았다. 동영상이 단 3개밖에 없는 그녀의 채널에 들어가 백만회가 넘는 쇼츠도 또 보았다. 이 정도면 나도 모르게 원소윤의 팬이 된 거겠지. 왜 좋은 걸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똑똑해서 좋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녀가 짠 개그에는 뭔가 서글픈 한 방이 있다. 뛰어난 통찰력은 기본. 본인을 ‘쌍둥이 형제’처럼 대한다는 이야기도 좋았다. 적당히 칭찬해주고 적당히 거리를 두는 쌍둥이 형제 말이다.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의 딸로서, 가족을 대하는 그녀의 모습에도 공감이 갔다. 생각해보니 소설의 반 이상이 가족 이야기로 채워져있다.


소윤의 어머니는 <꽤 낙천적인 아이>를 읽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상의 다른 책들도 이렇게 재밌었으면 엄마가 지금 굉장히 똑똑해져 있었을텐데’. 그녀에게 이것 이상의 칭찬이 있을까. 이 한 마디로 책을 쓰며 느꼈던 산고의 고통은 끝일 거다. 그리고 코미디언 원소윤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고 그녀의 팬이 된 사람도 여기 있노라고. 소윤의 소설을 읽고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부러워한 사람이 있다고 말이다. 쳇.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서울대생은 역시 똑똑하다. 앨리 웡 쇼보다 더 재밌는, 넷플릭스의 원소윤 솔로 오픈 마이크 무대를 기대해본다.


“실종 안내 문자가 오잖아요. 여러분한테도 오잖아요. 저한테 개인적으로 오는 거 아니잖아요. 저한테만 오는 거면 너무 무서울 것 같은데요? 문자를 보면 인상착의가 나란히 적혀 있어요. 회색 재킷에 갈색 바지. 근데 솔직히 어느 누가, 지나가는 할아버지 착장을 유심히 봅니까. 어, 가을 웜톤에 셔츠 레이어드 한 거 보니 박필만 할아버지다! 아무도 이러지 않는다고요. 차라리 이런 식으로 정보를 주는 게 효과적이겠죠. 박필만(남, 89세) 씨를 찾습니다. 170cm, 50kg. 위고비 처방받은 이순재 느낌.”


8월 연휴, 완벽한 날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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