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와 지구, 동물과 식물, 그 모든 것을 힘껏 껴안으려는 작가의 몸짓
어느 주말, 동네를 여기저기 정처없이 배회하다가 우연히 화랑 도서관에 들어가게 되었다. 회원 가입만 하면 책을 다섯 권이나 빌려준다니, 그것도 2주 동안이나. 책 다섯 권을 꽉꽉 채워 욕심껏 가방에 우겨넣어 왔는데, 2주가 훌쩍 지나 책이 모두 연체가 된 지금까지도 단 한 권밖에 읽지 못했다. 그 책이 바로 천선란 작가의 <어떤 물질의 사랑>이다.
연체하면서까지 완독한 책이 <어떤 물질의 사랑>이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다행스럽다. SF소설에 대한 공감이 어려웠던 나에게 이 소설집은 쉽고 재미있는 안내서와 같았다. 책에는 총 8편의 SF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그 중에는 꽤 어둡고 무거운 작품도,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작품도,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작품도 있는데 그 모든 작품에서 천선란 작가의 상상력이 빛을 발한다.
책을 모두 읽고 나무위키에 천선란 작가를 검색해보았다. ‘소설을 쓰는 게 너무 어렵고 즐거운, 무섭고 설레는, 언제라도 그만두고 싶지만 언제까지나 하고 싶다’는 작가의 말을 읽고 돌연 궁금해서 말이다. 천선란이라는 이름은 필명이고-가족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땄다고 한다-나이는 내 동생과 동갑, 본인이 좋아하는 풀과 고래, 우주를 타투로 새겨놓았다는 그녀. 어릴 적에는 만화광이었으며, 우주도 외계도 좋아하지만 그 중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는 것까지.
과연 이런 사람이기에 이토록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녀의 소설 속에는 우주인과 외계인, 좀비, 안드로이드, 정체를 알 수 없는 블랙홀 같은 것들이 등장한다. 그들-혹은 그것들-은 결코 현재의 우리와 먼 존재가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인물이나 환경처럼 느껴진다. 작가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이 언젠가는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며,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은 꼭 그녀의 소설 속에서처럼 반응할 것 같다는 예감. 가만 뜯어보면 이 소설들은 SF임에도 지금의 사회상과 인간 군상에 아주 견고하게 밀착되어 있다.
8편의 소설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작품은 <어떤 물질의 사랑>이었다. 과연 표제로 삼을 만한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라현에게는 배꼽이 없다. 생식기도 없다. 그래서 자신조차도 여자인지, 남자인지 성별을 알 수 없으며 그저 엄마가 ‘딸’로 키웠기에 여자이겠거니 하고 자랐다. 급기야는 본인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이게 도대체 무슨 허무맹랑한 이야긴가 싶겠지만, 주인공이 초등학교 때 첫사랑을 시작하며 이야기는 조금 더 흥미로워진다.
첫사랑이었던 민혁이를 좋아하며 주인공은 남자의 호르몬을 가지게 된다. 울대뼈가 조금 나오고, 목소리가 조금 낮아지는 정도. 그리고 중학교에 올라가 풀잎이라는 언니를 좋아하게 되며 다시 여성으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번에도 가슴이 살짝 뭉치는 정도로만. 라현은 상대방의 성별을 굳이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연애를 해나간다. 그러다 성인이 되고 어느 독립서점을 겸한 카페에서 본인과 동족인 듯한, 팔꿈치에서 비늘조각을 떨어뜨리는 라오를 발견하게 된다. 줄거리는 여기까지만 하고.
이 가늠할 수도 없이 넓은 우주에서 생명을 가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생명체가 우리 뿐이라는 건 오만일 것이다. <어떤 물질의 사랑>을 읽고 나면 우리 곁에 ’어떤 물질‘이 있기를 소망하게 된다.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아이가 어른이 되듯 비슷한 성장 과정을 거치는, 그럼에도 우리가 아닌 존재가 있기를. 혹은 어떤 존재에 대해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선을 긋고 배척하지 않기를. 조금 다른 점이 있더라도, 그가 사랑스러운 외계인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천선란 작가의 장편 소설인 <천 개의 파랑>이 영화화된다는 뉴스를 보았다. 2019년에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을 받고 난 지 6년만의 일이다. 심지어 할리우드, 워너브라더스 픽처스에서 계약한다고 한다. 이 작품은 또 얼마나 재미있길래. 영화가 나오기 전 원작 소설을 꼭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며, <미키17>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봐주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