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지고 뭉그러지더라도, 결국 사랑인 것을
[2025 이상문학상 작품집] 서평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단연코 이번 해의 발견은 예소연 작가일 것이다. 대상작 '그 개와 혁명'을 읽으며 자연히 이 소설이 수록된 소설집 [사랑과 결함]이 궁금해졌고, 두어 달이 지나 형열에게서 책을 빌리게 되었다. 지문을 빌려 형열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린 예소연 작가의 두 편의 소설 '그 개와 혁명', '마음 깊은 숨'만 읽어도 왜 그녀의 소설집 이름이 [사랑과 결함]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동명의 소설이 실려있기도 하다.) [사랑과 결함]에는 총 10편의 단편 소설이 담겨있는데 그 모두가 '사랑', 그리고 '결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소연 작가가 그리는 사랑과 결함의 모양은 왜인지 나에게 좀 더 깊숙히 와닿는 느낌이 든다. '그 개와 혁명'을 읽으며 아빠를 떠올렸듯, 묘하게 나의 가족과 겹쳐보이는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일까.
표제작인 '사랑과 결함'에는 화자의 고모가 등장한다. 화자는 그녀를 고모라고 부르기보다 '순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왔는데, 고모가 그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화자의 아버지와도 열 다섯살의 터울이 지는 순정은 화자의 할머니이자 엄마이자 언니, 친구이기도 한 인물이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살아온 화자와 순정의 끈끈한 애착 관계는 어느 순간 애증의 관계로 변화한다.
"분명 나와 고모 사이에는 공유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내가 태어나면서 물려받은 무언가였을 수도 있고, 고모의 영성체를 받아먹고 주름진 손등을 쓰다듬으며 이루어진 느슨한 관계성이었을 수도 있다. ...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고모나 엄마가 그저 나에게 끔찍한 사랑을 흠뻑 물려주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아직도 그 사랑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랑과 결함이 나를 어떻게 구성했는지도."
순정을 바라보며 백령, 나의 큰고모를 떠올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큰고모의 원래 이름은 민정이었는데 어느 순간 자신을 백령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고모는 평생을 혼자 살았고 당연히 자식도 낳지 않았기에 나와 내 동생을 조카 이상으로 친밀하게 대하고 챙겼다. 아빠와 엄마도 우리가 큰고모를 더 존중하고 위하길 바랐으며, 사실은 지금까지도 그 기대에 꽤 부응하고 있다.
어렸을 적 내 눈에 백령은 세련되고 멋진, 그러면서도 꽤 엄하고 카리스마 있는 어른이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그 때의 백령의 나이 즈음이 된 지금, 어렸을 땐 보이지 않았던 백령의 결함까지도 너무나 선명히 보인다. 할아버지가 그랬고 현재의 백령이 그렇듯, 나의 어딘가에도 분명 존재할 결함 말이다. '사랑과 결함'의 화자와 순정의 관계처럼 나 역시 백령을 사랑하고 걱정하지만 결코 엄마와의 관계성만큼 가까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관계는 친밀하지만 침범할 수 없는, 분명히 무언가를 공유하지만 완전히 합쳐질 수는 없는 그런 관계다.
'분재'의 차연에게서는 외할머니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차연의 아파트 발코니에서 외할머니의 집을 보았다. 나는 외할머니의 베란다에 정확히 어떤 식물들이 있는지 잘 모르지만 차연이 기르는 제라늄과 천냥금, 은행나무, 무화과나무랑 비슷한 류일 것이라 생각한다. 여든을 앞두고 있지만 꽤 건강한 차연, 혼자 살면서 집 안팎을 돌보는 그녀의 일상,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다보니 저절로 살아지는 삶.
"괜히 마음이 불안해져 신문을 덮고 라면을 끓였다. 도무지 밥 차릴 기운이 나지 않았다. 식구가 없는 게 이럴 때 좋네. 차연은 그렇게 생각하고 효효효, 노래를 부르듯 작게 호흡했다. 식사를 마친 후 수진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증상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먼 곳 사는데 괜히 발만 동동 구를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파서 그랬다. 차연은 대신 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피곤해서 자꾸 눈을 흐리게 떴고 그러다보니 꾸벅꾸벅 졸게 되었다.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면서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살게 좀 내버려두었으면. 성실하게 납세하고 애들도 기르고 시집도 보냈으니까. 그래도 누가 그런 말을 해주면 좋을 텐데. 열심히 살았구나, 그런 말. 그러다보니 남편이 그리워졌다."
나는 외할머니의 과거를 소설 속 차연의 젊은 시절만큼도 모른다. 아주 가끔 엄마한테 귀동냥으로 들은 게 다일 뿐, 나의 외할머니가 아닌 '최복자'씨의 삶이 어땠는지 제대로 궁금해해본 적도 없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꽤 오랫동안 복자씨는 혼자 자신을 돌보며 살아왔다. 그 하루하루의 일상이 모여 어느새 25년이라는 긴 시간이 되었다. 여든이 넘고서도 복자씨는 남부럽지 않게 건강하셨는데-나는 어딜가나 우리 외할머니가 얼마나 정정하신지 자랑하곤 했다-아마 젊었을 때부터 춤을 추고 자유롭게 살아서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나의 장밋빛 추측일 뿐, 복자씨도 꽤 고독하고 외롭지 않았을까. 복자씨는 몇달 전 집에서 넘어져 지금은 병원에 계시다. 내친 김에 복자씨에게 전화를 걸어봐야겠다.
[사랑과 결함]은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읽었던 두 편의 소설이 주었던 인상에 더해 더 깊고 다채로운 감각을 깨워주었다. 특히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의 3부작 시리즈를 읽으면서는 예소연 작가가 이렇게 어둡고 적나라한 성장통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우리 철봉 하자', '도블', '내가 머물던 자리'를 읽으면서 나를 지나친, 내가 지나온 많은 친구들을 떠올렸다. 어느 순간만큼은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소중하게 여겼는데 어쩌다 이렇게 멀어지게 되었는지도.
사랑이란 감정이 결코 매끈하고 예쁘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을 안다. 얼룩지고 생채기가 나고 어떤 면은 뭉그러지더라도, 그것 역시 사랑이라는 것도 안다. 우리 모두가 결함을 안고 있으니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그 결함까지도 껴안아야 한다는 것을. [사랑과 결함]을 읽으며 예소연 작가의 세계를 좀 더 깊숙하게 알게 되어 기쁘다. 누군가 요즈음의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묻는다면 예소연 작가 책 읽어봤니, 라고 애정을 담아 대답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