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만큼이나 명백히 사라져야할 것은 무엇인가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이 우리나라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한 건 불과 몇 년 전부터였을 것이다. 2022년에 그녀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2023년에 [맡겨진 소녀]를 원작으로 한 ‘더 콰이어트 걸’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며 시너지 효과를 낸 것이다. 나 역시 그녀의 대표작인 그 두 소설을 작년에야 읽었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대부분 100페이지 안팎의 짧은 분량이기 때문에 비교적 읽기는 쉬우나, 반대로 쓰기는 정말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짧은 이야기 속 감정이 배제되고 정제된 문장들을 통해 인간의 따뜻함도, 모순도 그려내기 때문이다.
클레어 키건은 창작 활동을 시작한 1999년부터 지금까지 단 다섯 권의 책을 냈다. 그 간격도 꽤 길다. [너무 늦은 시간]을 읽을 이유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귀한 그녀의 최신작이니 말이다. 또한 클레어 키건의 책을 처음 펼쳐 몇 번이고 다시 문장을 곱씹어보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 대개 아주 잔잔한 묘사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문장을 찬찬히 읽어내려가다보면 그녀가 그리고자 했던 풍경이 오감으로 느껴진다. 예를 들어 [너무 늦은 시간] 속 동명의 첫 번째 단편 시작 부분을 보자.
“7월 29일 금요일에 더블린의 날씨는 예보와 같았다. 오전 내내 뻔뻔한 햇볕이 메리온 광장에 내리쬐면서 카헐이 지키고 있는 열린 창가의 책상에까지 들어왔다. 잘린 풀의 맛이 바람을 타고 들어왔고 이따금 후텁지근한 바람이 창틀의 담쟁이덩굴을 흔들었다. 그림자가 지나가서 바깥을 내다보자 저 높이 제비들이 패를 나눠 싸우고 있었다. 그 아래 잔디밭에 사람들이 나와서 일광욕을 했고 아이들도 있었으며 꽃밭에 꽃이 만발했다. 얽히고설킨 인간의 싸움과 모든 것이 어떻게 끝날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대체로 매끄럽게 흘러갔다.” (p.12-13)
꽤 쌀쌀한 가을 밤 대한민국에서도 한여름의 더블린을 느낄 수 있다. 보통은 작동하지 않던 머릿 속 오감 센서가 그녀의 문장들 덕분에 켜진 느낌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끝까지 읽으면 알 수 있듯 방점은 문단의 마지막 문장에 찍혀있다.
앞서 말한 두 가지 소설에 대해 잠시 설명해야겠다. [맡겨진 소녀]는 말 그대로 먼 친척 부부에게 맡겨진 소녀가 인생 최초로 유사 가족의 따뜻함을 느끼는 이야기이고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일랜드의 한 소시민이 선함의 용기를 내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기존에 읽었던 그녀의 두 작품이 모두 일종의 따스함을 품고 있었기에 [너무 늦은 시간] 역시 큰 틀에서는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왠걸. [너무 늦은 시간]의 부제는 ‘여자들과 남자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프랑스의 번역판 제목은 ‘미소지니 Misogynie’다. 그렇다. ‘여성혐오’라 번역한 것이다.
[너무 늦은 시간]에는 총 3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1999년에 쓴 ‘남극’, 2007년 작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2022년에 발표된 ‘너무 늦은 시간’이다. 총 25년에 걸친 이야기들이니 클레어 키건 역시 여성과 남성의 간극에 대해 오랫동안 탐구한 것으로 보인다. 책의 첫머리에 실린 문장을 보자.
“우리가 아는 것, 항상 알았던 것, 피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은 옷장만큼이나 명백하다. 한쪽은 사라져야 한다. - 필립 라킨, [새벽의 노래Aubade]”
과연 우리는 도무지 공생하기가 어려운 것인가. 남성과 여성 말이다. 아마 이 질문을 10대의 나에게 했다면, 20대의 나에게,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한다면 매번 대답이 다를 것이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연령과 성별의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그들의 대답 역시 각양각색이지 않을까. 그만큼 우리는 복잡다단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다. 사상도 생각도 경험도 여러 갈래로 다양해졌지만 ‘혐오’라는 감정의 색채가 진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첫번째 단편 ‘너무 늦은 시간’에는 주인공 카헐과 그의 피앙세인 사빈이 등장한다. 그들의 결혼 준비 과정과 사이사이 어긋나는 감정들은 묘하게 친숙했다. 서로의 매력에서 시작해서 사랑이 되고 자연스레 습관이 되는 일 말이다. 그렇게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잘 굴러갈 것만 같지만 ‘가끔 신경을 건드’리는 것들이 생기는 것. 소설 속 균열은 약혼반지를 맞추는 과정에서 커다랗게 드러난다.
“몇 주 뒤 금요일 저녁에 두 사람이 반지를 찾으러 갔을 때 치수 조절 비용으로 128유로와 부가가치세가 추가되었다. 카헐이 사빈을 거리로 데리고 나가서 추가 비용은 못내겠다 말하자고 했지만 그녀는 추가 비용이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면서 몰랐다고 말하기는 싫다고 했다.
“내가 돈을 찍어내는 줄 알아?” 카헐이 말했다. 그 순간, 가장 행복한 날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기뻐야만 하는 날에 아버지의 말버릇이 그의 인생에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p.26)
카헐은 금세 사과했고 사빈은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렇게 다시 결혼 준비를 이어가는 듯하지만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 결말이 끝내 해피엔딩은 아닐 거라는 걸. 카헐은 평범하고 일견 다정한 남자이기도 하지만 그의 생각 속에는 사빈이 지적한 것처럼 ‘여성혐오’가 배어 있다. 그녀가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그녀가 차려준 식사에 대해 고맙다고 말한 적이 없었으며, 사빈이 본인의 말대로 하지 않고 멋대로 구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빈에게 청혼했지만 막상 그녀의 수많은 물건들이 그의 집으로 옮겨 왔을 때 아연실색한 것까지 말이다.
“난 이런 식일지 몰랐어, 그뿐이야.” 카헐이 말했다. “그냥 당신이 여기 같이 있고, 같이 저녁을 먹고, 아침에 같이 일어난다고만 생각했지. 그냥 너무 현실적이라서 그래.” (p.35)
우리의 성별에 따라 이 소설에 대한 견해가 달라질지 문득 궁금하다. 내가 남성 독자라면 카헐을 이토록 못나고 찌질하게 그린 작가에 대해 분개할까. 아니면 카헐의 입장에 서서 사빈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게 될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느끼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카헐에 대해 실망하고 이 모든 상황에 대해 한번 더 좌절하게 될까. 이미 9년 가까이 지난 소설이지만 사실은 [82년생 김지영]을 읽을 때도 비슷한 감정이었다. 같은 해에 개봉한 ‘500일의 썸머’도 마찬가지다. 다른 성별의, 그러나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과 함께 공유하고 싶었던 마음, 공감하고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었던 마음이 들었던 것 말이다. 사실 지금 와 생각해보니 그 마음을 온전히 돌려받고자 한 건 욕심이었던 듯하다.
맞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옷장만큼이나 명백하다. 그 차이를 서로 동등하게 인정하면 좋겠지만, 사실은 나부터가 제일 못하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나와 다르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나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편을 가르고, 내 쪽에 선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면 작은 일에도 분개한다.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많은 예들이 있지만 그것조차 이 지면에 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보라. ‘여성혐오’에 대한 글을 쓰는 것조차 얼마나 어려운가.
두번째 단편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은 한 여성 작가가 글을 쓰기 위해 레지던스에 방문했다가 어떤 남성 교수에게 봉변을 당하는 일을 그린다. 그는 그녀가 다른 많은 후보자들 중 선정되어 여기 왔음에도 글을 쓰지 않고 한가롭게 놀러다닌다고 생각하며 분개하고, 비난하고, 길길이 날뛴다. 특히 마지막 부분이 맘에 들었던 것은 그녀가 바로 그 ‘글’로 그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시원한 복수다. 세번째 이야기인 ‘남극’은 여성의 욕망을 다룬다. 평범한 주부인 여주인공이 욕심 낸 조그만 일탈, 그 욕망의 끝이 얼마나 끔찍한지 말이다.
이상한 기분이지만 이 모든 이야기가 나를 둘러싸고 있음을 느낀다. 대상화된 여성 캐릭터들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본다. 적어도 내 인생에 한번쯤은 스쳐갔을 감각임을 인정한다. 그리고는 다시 첫 문장의 옷장을 떠올려본다.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 한쪽이 다른 성별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랑과 등을 대고 있는 혐오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사랑이 존재하려면 혐오는 사라져야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것들은 공생할 수 없음을,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그에 대한 혐오는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 가까이 있는, 내가 아끼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상상을 해본다. 9년 전과 지금은 다를 수 있을까. 어쩌면 뒤쫓아올 실망과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설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