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과 불편의 도시

5월 29일

by 너랑

에펠탑 근처를 한참을 걸었다. 파리에 왔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지금 지내고 있는 15구는 에펠탑에서 꽤나 가까워서, 걷다 보면 에펠탑이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싶을 정도로 갑작스럽게 나타난다. 항상 7-8월의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파리의 모습만 봤었는데 5월의 파리는 한적해서 낯설다. 사람들이 쯔쯔가무시가 두렵지도 않은지 벌러덩 누워서 햇빛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일랜드에서 입은 선번이 아직 쓰라렸고, 쯔쯔가무시도 두려웠기에 잔디밭 옆에 서서 낭만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낭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어학원 레벨 테스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어학원에서 연락을 준다고 했는데, 연락을 전혀 받지 못해 어리둥절하다. 이것이 역시 파리의 행정인가 보다. 등록하든 말든 어학원의 직원들도 별로 관심 없는 것 같다. 사실 프랑스어 실력이 허접함 그 자체인데, 레벨 테스트를 뭘 기다려야 하겠냐만은, 그래도 다시 abc부터 배우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생각에 굳이 시험을 보았다.


혼자 지내다 보니, 한 사람이 살아 가는데 생각보다 많은 물건들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일단 샴푸도 사야 했고 바디로션, 물, 커피 그리고 세탁용 세제까지. 매일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부모님께 기대어서 지내왔구나 새삼 알게 된다. 거기다 교통권까지 만들고 보니 가슴이 쓰라릴 정도로 많은 돈을 썼다. 호구처럼 5 존까지 갈 수 있는 1주일권을 끊는 바람에 생각보다 지출이 더 커졌다. 그 때문에 뽕을 뽑기 위해 원하지도 않는 베르사유와 근교의 아웃렛에 가야 하는 위기에 처했다. 없는 살림에 베르사유에 아웃렛이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호구당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가지 않았을 것이므로, 한 번 가보자고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하고 있다.


아직은 지내고 있는 방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밤에 불을 켜도 방이 어두움 그 자체인지라 더 우울했다. 불이 어찌나 미약한지, 방에서 불 하나만 켜놓고 있으면 반딧불이 모아놓고 책을 읽던 선비들을 저절로 코스프레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집주인에게 물어보니 미러볼같이 생긴 전등 가운데에 있는 실을 잡아당기면 미러볼이 펼쳐지면서 환해진다고 했다. 그런 건 진작 말해주셨으면 좋았잖아요. “많이 어두우셨겠는데요?”라고 그녀가 물었다. 우는 표시를 하며 “저는 원래 그런 건 줄 알았어요. 파리는 낭만과 불편의 도시이니까요.”라고 대답을 했더니 그녀는 매우 적확한 표현이라며 웃었다.



광명찾는 모습


낭만과 불편의 도시 파리. 거기다 하나 덧붙이자면 불친절의 도시 파리. 사람들은 친절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기대하지 않으면 생각보다 친절하다. 아, 물론 아주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 익숙해지다 보면 누군가의 지나친 친절을 보면 불편함까지도 느끼게 된다. 오늘 간 카페의 남자 주인은 이탈리아 사람이었던 것 같다. 카드 결제를 하려는데 친절하게 웃으면서 어떤 방식으로 카드를 갖다 대어야 하는지 유치원생에게 알려주듯 보여주었다. 그의 투머치 친절에 나를 놀리는 것인가 오히려 언짢아지기까지 했다. 프랑스어를 못하는 거지 바보는 아닌데. 나도 파리지앵처럼 점점 까칠해지나 보다.


파리에 온 지 고작 이틀차이지만 이처럼 아주 빠른 속도로 프랑스 문화에 젖어들고 있다. 3개월을 다 채우고 나면, 길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빵을 먹고 한국인들이 상종 못할 정도로 까칠한 사람이 될까 봐 겁이 난다.


keyword
이전 01화열쇠와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