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5일
소풍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잠들었던 어린이는 설렘을 가득 품고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뉴스를 보니 비가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곧이어 소풍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어린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아침 댓바람부터 학원에 갔다. 드디어 새로운 사람들도 사귀고 본격적으로 프랑스어를 배운다는 생각에 한 껏 들떴다. 하지만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리셉셔니스트는 내 이름을 듣자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를 검색하고 또 검색했다. 마음이 점점 불안해져 갔다. 그녀는 레벨테스트를 본 것이 정말 맞냐며, 내 테스트 결과가 없단다. 그러더니 삼십분을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없어요… 없어요…" 하며 요란하게 타자기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컴퓨터에 입력했다. 검색할 수 있는 플랫폼이 그렇게 많을리 없는데… 인터넷 쇼핑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녀는 계속 무엇인가를 키보드로 쳤다. “구두시험을 담당한 선생님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면 되잖아요!”라고 하고 싶었으나, "한국인들은 이 나라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는 군요. 아직은 그 사람이 일하는 시간이 아니라고요. 프랑스 사람들은 업무 시간 외에는 일하지 않는 것 몰라요?" 라는 말을 들을까 꾹 참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나올 리 없는 컴퓨터만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정말 미안하다며 특단의 조치로 내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들어 다행이었다.
지난주는 어쨌든 쉬면서 공쳤으니, 6월인 지금은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지지난주 일요일에 메일을 보내서 문법시험을 보았고, 지난주 금요일에는 오랄테스트를 겨우겨우 보았다. 하지만 장장 일주일에 거친 어학원 등록과정이 다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며, 어학원의 한국인 담당자에게 연락을 했다. 내 레벨테스트 결과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고. 한참 후에야 담당자로부터 정말 시험을 본 것이 맞느냐는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파리를 걷고 또 걸었다. 빵집이 보여 크루아상을 사 먹었는데 열받게도 너무 맛있었다. 프랑스는 행정으로 화나게 하고, 빵으로 화를 풀어주는 이상한 나라다. 크루아상 두 개를 먹으면 화가 다 풀려 버릴까 봐 하나만 먹었다.
휴직 후에 러닝에 취미를 붙여서, 프랑스에 와서도 러닝을 하려고 러닝화와 러닝복을 바리바리 챙겨왔다. 한국에서는 핸드폰만 손에 쥐고 뛰면 됐었는데, 이곳에서는 어딜 가나 꼭 챙겨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열쇠다. 러닝용 바지는 주머니가 얕아 생명줄과도 같은 열쇠가 빠질 것 같았다. 열쇠 강박을 가지게 된 사람으로서 운동할 때 쓸 수 있는 가방이 필요했다. 아디다스 사이트에서 적당해 보이는 작은 가방을 구매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엇을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이틀정도면 오는데. 여기는 일주일은 양반이다. 역시나 가방이 일주일 만에 매장에 도착했다는 메일을 받았다. 매장에 갔는데 사실은 가방이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면, 이번에야말로 빨리빨리 병에 걸려서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다행스럽게도 직원들은 가방을 빨리빨리 찾아주었다. 내일부터 공부는 못해도 러닝이라도 할 수 있겠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지덕체중에 지는 놓쳤어도 체는 챙겼다.
일상이 비는 것이 겁이 나고, 그 어학원을 믿을 수 없어져 두 곳이나 다른 곳을 찾아서 원서를 넣었다. “당장 내일이라도(이건 그들에게 불가능하겠지) 내일 모레라도 나를 받아다오!” 라고 간절하게 외쳤다. 내 외침에 대한 메아리가 돌아오길 바라면서. 아, 이 곳은 프랑스인지라 메아리도 일주일은 지나야 돌아온다.
자려고 보니 아디다스에서 메일이 와 있다. 빨리 물건을 찾으러 오라는 메일이었다. 내가 물건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서… 프랑스에서는 어학 시험을 봐도 안 본 것이 되고, 물건을 가지고 와도 왜 안 오냐고 묻는다. 눈에 띄지 않는 유령이 된 기분이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이렇게 시스템이 엉성해도 나라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사에 너무 열심히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프랑스인들처럼 대충 살아도 어떻게든 살아진다는 교훈을 얻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