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4일
학원수업이 끝나고 교외활동으로 파리 투어가 있었다. 가이드는 유쾌한 프랑스인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이름과 어디서 왔는지를 물어보았다. 내 이름에는 h가 들어가는데 프랑스어는 아몬드 시에프처럼 h가 묵음이다. 그래서 그는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한참을 헤맸다. 나는 웃으며 이름 읽는 법을 알려주었고, 출신국가에 대해서도 소개를 했다. 다들 투어로 들뜨고 즐거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문제는 갑자기 시작되었다. 그가 어떤 여자의 이름을 부르고 너는 어디서 왔냐고 물어봤다. 그 여성은 모스크바에서 왔다고 했다. 가이드는 잠깐 멈칫했다.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그 짧은 순간을 잘 못 알아 챌정도였다. 하지만 그 러시아인 여성은 “내가 푸틴은 아니잖아?”라고 말하며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둘이 대화를 멈추었고, 출석체크가 다음 사람으로 넘어갔다. 그럭저럭 상황이 마무리되었구나 싶었다. 그런데 별안간 러시아 여성이 가이드에게 “너 이름이 뭐야?”라고 물어봤다. 가이드는 당황한 듯 보였지만 본인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러시아인은 큰 소리로 ”뭐가 문젠데? 모스크바에서 왔다고 하니 너 한숨 쉬었잖아? 난 푸틴이 아니야. “라고 가이드를 몰아붙였다. 갑자기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다. 수많은 나라에서 온 학생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가이드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내가 사실은 푸틴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러시아 여인은 혼자서 계속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적더니 요란하게 짐을 싸서 전화를 하며 나가버렸다. 다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앉아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인 가이드는 최대한 태연한 척했다. 나는 제삼자로서 그들을 지켜보면서 느꼈다. ‘프랑스인은 프랑스인처럼 감정을 감출 줄 모르고, 러시아인은 러시아인 답게 제대로 싸우는 방법을 아는군.’하고. 학생들 몇몇은 그녀를 지지하며 투어에서 빠졌고, 나와 몇몇은 가이드를 따라서 파리를 투어 했다. 현지인이 설명해 주는 파리 투어는 몰랐던 것들을 많이 알게 해 주었고 꽤나 알찼다. 그러나 투어를 하면서도 머릿속으로 그 싸움을 곰곰이 생각했다.
러시아인과 프랑스인의 방식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분노를 저런 식으로 표출할 수 있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나는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불편한 것이 있어도 최대한 무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러시아 여성은 자기가 불편한 순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항의했다. 가이드의 행동은 그가 푸틴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은 러시아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녀의 반응으로 인해서 아무리 자기 감정을 숨기지 않는 프랑스 사람이라고 해도 다음에 러시아인을 만났을 때는 조심할 것이다.
가이드도 짧은 순간 자기가 싫은 것을 표시한 것은 미성숙했다. 어쨌든 인터내셔널 한 자리였으니 누군가는 혐오 발언에 상처받을 수 있다. 함께 갔던 친구들은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어쨌든 사과 했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잘 끝마쳤다. 그 일에 대해 내색하지 않았고 학생들을 세 시간 반동안 투어를 데리고 다니면서 적극적으로 파리를 소개해주었다. 내가 그였다면 정신이 나간 듯 허둥지둥했을 것이다. 사람은 실수할 수도 있지만, 실수해도 수습하면 된다. 물론 수습 못하는 실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주어진 상황에 적당히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을까. 한 번 실수하면 세상이 무너지듯 구는 결벽증 환자처럼 살아온 건 아닐까.
나와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이것도 떠나와서 가능한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