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신문물 접하기

6월 8일

by 너랑


아무런 목적도 없이, 친구도 없는 도시에 오래 머물면 적적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는 치트키가 있다. 바로 발레 수업이다. 이번에 들었던 수업은 십 년 전에 파리에 여행을 왔을 때 들었던 선생님의 수업이었다.


시간이 지났지만 그녀의 모습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십 년 전에 당신의 수업을 들었다고 했더니 그녀는 놀란 기색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불어도 할 줄 모르는 학생을 따스하게 대해주신 것이 감사해서 한국에서 준비해온 마그넷도 드렸었다. 그녀는 그 마그넷을 자기 냉장고에 잘 붙여놨다고 하면서, 너 한국에서 온 그 아이냐고 기억해 주셨다. 좋은 것을 드렸어야 하는데 마그넷을 드리고 생색이라니 멋적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그넷마저도 안 사가지고 와서 드릴 게 없다. 가지고 있는 가장 한국적인 것인 고추장이나 참기름, 짜장범벅을 드릴 수도 없으니.


발레 수업을 홀 밖에서 기다리는데 그전 시간 수업이 매우 요란했다. 그 수업의 수강생들은 짐승이 포효하는 것 같은 소리를 끊임없이 질러댔다. 기다리던 사람들은 시끄러운 소리에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문이 꼭 닫힌 홀을 바라보다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옆에 있는 여자아이에게 도대체 앞에 수업이 뭐냐고 물어봤다. “응 저건 샤우팅 클래스야.”라고 그녀는 대답했다. 내가 귀를 의심하며 “뭐라고?” 되물었더니 그녀는 갑자기 엎드리는 자세를 하며 엉덩이를 흔들었다. “이렇게 엉덩이를 흔들면서 소리를 지르는 거야.” 몸을 아끼지 않는 설명에도 놀랐지만 더 놀라운 건 수업의 이름이었다. 수업의 이름은 ‘엉덩이 테라피(Booty Therapy)’란다. 농담하는 것 아니다.




엉덩이를 흔들면서 소리 지르는 것만으로 어떻게 사람이 치유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수많은 치료요법들이 있긴 하지만, 트월킹으로도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성공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봤을 때 지나치게 의심하거나 놀라기만 하면 안 된다. 다른 방향에서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한다. 어쩌면 필라테스, 요가가 주름잡고 있는 한국 운동계에 긴장감을 줄 때가 된 것일 지도 몰랐다. 엉덩이 테라피 클래스를 수입해 가서 일타강사가 되는 것은 어떨까. 사람들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며 소리 지르는 방법을 가르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봤다. 정말 못볼꼴일 것 같다. 하지만 진로 고민을 하고 있기에, 다음 주에는 엉덩이 테라피 클래스를 들어봐야겠다.


십 년이 지났지만 선생님의 에너지 넘치는 수업은 여전했다. 그녀의 나이가 칠십 즘 되었을 텐데도. 원래 턴이 쥐약인 사람인데도 선생님이 단호하게 돌라고 하셔서 얼떨결에 턴도 두 바퀴를 돌았다. 오랜만에 같은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니 나의 발레도 아주 조금은 늘었구나 싶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 엉덩이 클래스에 대해서 알려주었던 친구와 맥주를 한 잔 했다. 그녀는 터키 사람이었다. 직업은 살사 댄서고 뉴욕에 가서 곧 오디션도 볼 예정이라고 했다. 그녀와 이야기하는 것은 즐거웠다. 그녀가 엉덩이 테라피를 몸으로 설명해 줄 정도로 유쾌한 사람이기도 하고, 이렇게 사람과 면대면으로 대화하는 것이 오랜만이기도 해서.


여행에서 가장 즐거운 부분은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일상에 존재할 수 없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언제 엉덩이 테라피와 같은 서구 세계의 신문물을 알고, 살사 댄서를 친구로 사귀어보겠는가.


물론 엉덩이 테라피는 많은 한국인들이 해볼 수 있도록 내가 수입해갈 것이다. 명의처럼 한국인들의 아픈 곳을 엉덩이 흔들기로 고쳐주고 싶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사명감에 벌써부터 가슴 한 구석이 뜨거워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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