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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랑 Jun 05. 2023

축사

6월 4일



  친구와 줌 미팅을 했다. 내가 그녀의 결혼식에 축사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에 나와있음에도 타인의 중대사에 큰 역할을 하게 되어 어깨가 많이 무거웠다. 친구의 남편은 해외여행가 있는 친구에게 그런 걸 시키냐며 “넌 눈치도 없냐?”라고 핀잔을 주었단다. 하지만 내 친구는 당당하게 “나는 눈치도 없고, 친구도 없어!”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다. 자칭 눈치 없는 그녀의 몇 안 되는 친구로서 책임감이 막중했다.


 친구의 소중한 날에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부담이 느껴지면서도 즐거운 일이다. 대학교 때 친하던 친구의 부케를 받던 날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화사한 옷도 구입하고 결혼식 당일에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미용실에 가서 머리도 했다. 부케를 잘 받는 방법도 검색해서 혼자서 연습해보기까지 했다. 친구가 나에게 맡겨준 역할이니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다른 친구가 결혼할 때는 가방순이를 자처하기도 했었다. 신부 대기실에 앉아서, 친구들의 축의금을 신부의 가방 속에 삥땅 쳐 용돈을 챙겨주는 역할이다. 친구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친구가 뒷 주머니 차는 것을 도왔었다.  


 그런데 축사는 정말이지 처음이다. 연예인도 아닌데 영상 편지로 축사를 보내야 하다니. 어깨가 더 무거워져 옷걸이 어깨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친구의 신랑이 나의 마음의 짐 아니 어깨의 짐을 많이 덜어주었다. 친구의 남편 될 사람은 원래는 아주 고풍스러운 결혼식을 꿈꿨다. 그는 친구에게도 바로크풍의 여왕님 같은 드레스를 추천했다. 친구가 그에게 축가를 부르는 것이 어떤지 권하자, 어찌 감히 주인공인 신랑에게 축가를 바라느냐고 되물었단다. 긴 버진로드는 그의 꿈이라고 했다. (남자들도 웨딩에 로망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버진로드가 길수록 신랑이 혼자서 걸어오는 시간이 길어지니 주목도가 높아져서 그렇단다.


 그토록 화려한 결혼식에 집착하던 그의 마음이 무슨 일인지 달라진 모양이었다. 최근에 ‘범죄도시 3’을 인상 깊게 본 것이 화근이었다. 입장곡으로 영화 ‘범죄와의 전쟁’ ost를 틀고 “드가자!” 하며 본인의 친구들과 단체로 입장하겠다고 선언했단다. 거기다가 축가도 본인이 부르기로 했다. 고심해서 선곡을 하고 있는 그의 플레이 리스트에는 트로트가 가득했다. 갑자기 로맨스에서 조폭 코미디물로 장르가 바뀐 결혼식에 일반인인 내가 영상편지로 축사를 읽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니 신랑에게 고마움을 감출 수 없었다.


  축사에 본인은 인정하기 쑥스러워하는 친구의 장점을 적었다. 그리고 그녀가 열렬히 응원하는 팀인 롯데 자이언츠와 결혼 생활의 성공을 관련지어 글을 엮어내었다. 그녀는 팀이 (장기간) 부진할 때도, 팀을 믿어주는 인내심 있고 의리 있는 사람이니 결혼 생활도 잘할 것이다. 쓰면서 어쩐지 감정이 차올라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축사를 읽어주니, 친구 역시도 눈물을 보였다. 부디 알러지성 결막염 때문에 눈을 휴지로 찍은 것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여하튼 친구에게 더 아름다운 문장들을 선물해주고 싶다. 나에게 이런 중역을 맡겨준 친구를 위해서라도, 그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라도, 내 어깨의 짐을 덜어준 그녀의 남편의 쇼맨십을 위해서라도 마지막까지 더 열심히 퇴고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내일부터 어학원을 다닌다. 파리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처음으로 소풍을 가는 초등학생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학원 가방을 챙겼다. 파리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 선택으로 만들겠다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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