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건너에 그녀들이 서 있었다. 히루시는 나를 향해 손을 번쩍 들어 올렸고, 타루시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보행 신호는 초록색으로 바뀌었고, 나는 건널목을 건너가 타루시를 꽉 끌어안았다.
타루시를 처음 본 건 7년 전 여름이었다. 타루시는 콜롬보 농학교에 갓 입학한 1학년이었고, 나는 그 농학교의 주말 자원봉사자였다. 스리랑카에 농학교가 몇 개 없다 보니 전국 각지의 농인들이 입학했고, 통학이 어려운 학생들은 기숙사에 살았다. 1학년부터 13학년까지 있었던 학교에서 타루시는 유일한 1학년 기숙생이었다. 나는 주말에 아이들의 빨래와 청소를 도왔는데, 타루시가 자기 키보다 큰 나무 빗자루를 들고 낙엽을 쓰는 모습이 어찌나 대견하던지. 비록 타루시는 소리를 듣지도, 말을 하지도 못했지만, 그 아이가 내는 빗자루 소리는 내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다.
학교에 큰 행사가 있어 학부모들이 찾아온 적이 있다. 타루시의 가족들을 그때 처음 만났다. 그들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당시 타루시의 친언니 히루시는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서툰 싱할라어로 자랑스레 말했다. "타루시는 혼자 밥도 잘 먹고, 설거지도 잘하고, 손빨래도 잘하고, 빗자루질도 잘해요. 학교에서 타루시가 제 선생님이에요. 어쩜 이렇게 어린 친구가 공부도 잘하고, 언니들도 잘 따를까요? 참 사랑스러운 아이예요."
그로부터 여섯 해가 흘렀고, 우리는 콜롬보 켈라니야 대학교 앞에서 다시 만났다. 우리의 재회는 히루시가 비밀리에 주선했다. 곧 타루시의 생일인데, 히루시가 농학교 기숙사에 생일 특별 휴가를 신청해 타루시를 데리고 나올 테니 만나자고 한 것이다. 타루시는 갑자기 외국인이 달려와 반가워하는 모습에 어리둥절해하다가, 그게 나라는 걸 알아보곤 예전처럼 금방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히루시는 켈라니야 대학교의 한국어 전공생이 되었다. 우리에게 강의실과 학과 사무실을 구경시켜 주었고, 나와는 간간이 한국어로 대화했다. 히루시는 운 좋게도 졸업 전에 다른 기관에 한국어 강사로 채용이 되어 스리랑카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게 됐다며 기뻐했다. 켈라니야 대학교는 스리랑카에서 어문 계열로 우수한 명문대학교다. 그 학교에 입학할 성적이면 충분히 다른 학문을 전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히루시에게 어쩌다 그 길을 가게 됐냐고 물었다가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다.
"언니랑 한국어로 대화해보고 싶었어요."
히루시는 나 때문에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고 말했다. 내가 싱할라어로 동생을 다정히 칭찬하는 모습을 보고, 나와 한국어로 말해보고 싶어져서 한국어를 전공으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한국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그날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싱할라어로 말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어를 배우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그녀는 나로 인해 진로가 바뀌었고, 바뀐 진로에 만족한다며 수줍게 웃어 보였다.
"엄마도 언니를 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리고 어머니의 이야기도 꺼냈다. 막내딸이 가족의 품을 떠나 먼 타지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되기도 하고, 홀로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는 현실에 마음이 아파 자주 눈물을 흘리셨다는 어머니. 그런데 나의 진심 어린 칭찬을 듣고 걱정을 한시름 덜 수 있었다고. 히루시는 이제 어머니가 타루시를 학교에 안심하고 맡길 수 있어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싱할라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는 못한다. 그런데도 내 말을 듣고 진로가 바뀐 사람과 슬픔을 위로받은 사람이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 말이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줄 수 있다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앞으로 한 단어, 한 문장에 더 깊은 책임과 진심을 담아 신중히 사용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섬에 따뜻한 말이 쌓일 수 있도록.
밀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방 오후 2시가 됐다. 비자 연장을 하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광 비자로 스리랑카에 30일 이상 체류하는 외국인은 30일이 지나기 전에 비자를 연장해야 한다. 콜롬보에 나온 김에 이민국에 들러 체류 기간을 연장하려고 했다. 스리랑카 관공서는 일 처리 속도가 워낙 느리고, 특히 이민국은 최악의 행정으로 악명이 높기 때문에 지금 가도 비자 연장이 가능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민국에 계속 전화를 걸었으나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직접 찾아가서 확인해야 했다.
이민국처럼 큰 관공서에 혼자 가는 건 처음이라 조금은 긴장되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언어에 천부적인 재능이 없어 스리랑카에 2년 가까이 살았으나 이 나라의 말을 유창하게 잘하지는 못한다. 여전히 모르는 단어가 많고, 책을 읽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지만 말이 안 통해서 불편했던 적은 별로 없다. 잘 모르는 말도 일단 내뱉어보고, 상대가 못 알아들으면 "왜 너희 말을 못 알아들어?"라며 되려 큰 소리를 낸다. 예고 없이 연착되는 기차에도 인내심이 강한 스리랑카 사람들은 외국인의 어리숙한 싱할라어를 참고 잘 들어준다.
하지만, 이민국에서는 쉽지 않았다. 우려한 대로 비자 연장 접수처는 문을 닫았다. 근처에 있던 직원이 비자 연장 신청은 오후 1시 30분에 마감하고, 이민국은 4시 15분까지 운영한다고 말했다. 시곗바늘은 3시를 향하고 있었다. 이민국이 문을 닫기까지 아직 1시간이 넘게 남았다. 여기는 규범을 잘 지키지 않는 나라니까, 자비심이 가득한 나라니까 잘 이야기하면 추가 접수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직원에게 사정을 말했더니 사무실 몇 번 자리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직접 부탁해 보라고 알려줬다.
떨리는 마음으로 찾아간 자리에는 권위적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앉아 있었다. 쉽지 않아 보였다.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죄송하지만 비자 연장 시간을 착각해서 늦게 왔어요. 연장 신청 좀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지금 캔디로 돌아가야 하는데, 다시 콜롬보 나올 시간이 없어요. 저 스리랑카에 더 있고 싶어요."라며 간절히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시간을 엄수하지 못한 내 잘못이라며 비자 연장은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완고한 공무원이었고, 나는 고집 센 외국인이었다. 그는 표정 하나 없는 얼굴에서 유창한 영어를 내뱉었고, 나는 그에 못지않게 유창한 싱할라어를 쏟아냈다. 불리한 상황이 되자 나를 도우려고 스리랑카의 영혼이 옮겨붙기라도 한 것인지, 아니면 조금 전에 히루시의 이야기에 힘을 얻은 것인지, 오늘따라 싱할라어가 술술 나왔다. 내 생에 싱할라어를 가장 잘한 순간이 분명했다.
"이 세상 모든 공무원은 정해진 시간에 따라 일합니다."
"연장 못 하는 건 알겠는데요.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야겠습니다. 사무실에 이렇게 직원이 많은데 왜 단 한 명도 전화를 받지 않는 거죠?"
"우리는 홈페이지에 비자 연장 방법을 공지해 놨습니다. 홈페이지를 잘 봤어야죠."
"왜 모든 사람이 인터넷을 편히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글을 못 읽는 사람은요.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은요. 시골에 사는 사람은요.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은요. 도대체 어떻게 정보를 얻으라는 건가요. 여기는 누구를 위한 곳인가요. 당신들은 누구를 위해 일하나요."
홈페이지를 찾아보지 않은 건 나의 잘못이 맞았다. 하지만 그 순간 이 섬에서 소외된 친구들이 떠올랐다. 글을 배우지 못한 이마샤, 앞이 보이지 않는 마유라, 인터넷이 불안정한 곳에 사는 차투, 스마트폰이 없는 마해시, 관공서의 권위에 기가 죽던 친구들과 영어를 무서워하던 이웃들. 나는 그들을 대변해 싱할라어로 소리쳤다. 내 울분에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던 직원들과 창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고, 변함없이 강인한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스리랑카에 얼마나 살았던 거죠?"
"일 년 반 살았습니다."
"우리 말을 어떻게 잘하는 거죠?"
"잘하면 뭐 해요. 어차피 비자 연장 못 해서 이 섬 뜨게 생겼는데요."
"당신은 스리랑카에 진심이군요."
"네?"
"신청서 가져오세요. 일 년 반 만에 우리 말을 이 정도로 잘하는 사람은 당연히 스리랑카에 있어야 합니다."
그는 나의 신청서를 받아주었다. 실컷 욕하고 뻘쭘해진 나는 멋쩍게 웃으며 내가 경솔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는 더 이상 영어를 쓰지 않았다. 우리는 이 나라의 말로 조금 더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말이 마음속 깊이 새겨졌다. "당신은 스리랑카에 진심이군요." 그 말대로 나는 언제나 스리랑카에 진심이었다. 이렇게나 허술하고 고집스러운 외국인이지만 그 누구보다 스리랑카를 사랑했다. 이 땅에서 매 순간 최선을 다했고, 깊은 애정으로 성찰했다.
스리랑카에서 싱할라어를 고집했다. 이 나라의 언어로 말을 걸고 싶었고, 바르게 듣고 싶었다. 그건 언어 하나를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닿고 싶은 진심이었다. 스리랑카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싶으니까, 모국어로만 할 수 있는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까 부지런히 배웠다. 나의 싱할라어는 화려하지 않다. 아주 짧은 문장이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은 결국 통하는 법이다.
요즘 더는 스리랑카에 있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내가 이곳에 머무르는 게 이들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고, 스리랑카를 사랑하는 방식이 잘못된 건 아닐지 의심도 들었다. 그런 나에게 오늘 하나의 허락이 주어졌다. 그건 스리랑카에 더 머물러도 된다는 행정적 허가에 불과하지만, 내겐 이 섬이 보낸 또 하나의 초대처럼 느껴졌다. 지금처럼 진심으로 다가가면 된다는 허락. 내 방식대로 사랑하면 된다는 허락. 그 허락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