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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캔디입니다

by 미누리

"마게 나머 미누리, 마게 가머 누와라."

(이름은 미누리, 고향은 캔디입니다.)


캔디는 나의 정체성이다. 그래서 스리랑카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인사할 때 이름 뒤에 고향을 붙여 말한다. 이 나라에 그런 규칙이 있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묻지 않아도 굳이 내가 먼저 고백하는 건 캔디에 자부심이 강해서 그렇다. 비록 이곳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나의 첫 번째 스리랑카를 잉태한 곳이라 애착이 크다. 처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단 한 번 뿐이니 그 기억이 유난히 선명하고 강렬할 수밖에 없다.


캔디는 스리랑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스리랑카는 영국으로부터 한 세기가 넘도록 식민 지배를 당했는데, 캔디는 영국에 마지막까지 강렬히 저항했던 싱할라 왕조의 마지막 수도라는 점에서 스리랑카 싱할라족의 자긍심이 강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 이름도 예쁜 캔디는 사실 영문명이고, 스리랑카 사람들이 부르는 현지명은 '마하 누와라(Maha Nuwara)'다. 위대한 도시라는 뜻인데, 줄여서 '누와라'라고도 부른다. 그건 꼭 누워서 쉬다 가라는 말처럼 편안하게 들려서 좋다. 달콤한 캔디도, 친근한 누와라도 참 사랑스러운 이름이다.


아침에 정해진 목적지 없이 혼자 길을 걷다가 높은 산에 솟아있는 커다란 흰색 불상과 눈이 마주쳤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눈빛이 마치 내게 오라고 전하는 것 같아 즉흥적으로 방향을 바꿨다. 불상을 만나러 바히라와칸더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바히라와칸더는 스리 마하 보디 위하라야(Sri Maha Bodhi Viharaya)라는 절이 있는 언덕이다. 캔디 어디를 가도 눈에 띄는 흰색 불상이 바로 그 절에 모셔져 있다. 현지인들은 그 절을 진짜 이름 대신 바히라와칸더라고 부른다.


칸더는 산을 뜻한다. 바히라와칸더에 가기 위해선 그 이름처럼 가파른 오르막을 등산해야 한다. 캔디에만 있으면 용감해지는 나는, 오래전부터 스리랑카에서 신어 온 낡은 쪼리를 걸친 채, 더위에 헉헉거리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언덕을 오르는 택시 기사들이 어차피 올라가는 길이니 공짜로 태워주겠다고 몇 번 멈추었지만, 나는 기어코 혼자 걸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들은 내게 "쑤버 가만(좋은 여행이 되길)."이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떠났다. 오르막길에서 내려다보이는 캔디의 다채로운 풍경을 꼼꼼하게 감상하고 싶었기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나의 두 발로 올라가는 것을 택했다. 미련하지만 이게 내가 캔디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바히라와칸더는 캔디에서 가장 유명한 전망대이기도 하다. 불상 뒤편에는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을 돌고 돌아 꼭대기에 올라서면 캔디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건 캔디의 맑은 거울 같은 캔디 호수다. 따뜻한 햇살을 받아 푸르디푸른 물빛을 뽐내며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으니 시선을 안 줄 수가 있나. 금방 두 발로 지나쳐 온 길이지만 멀리서 보니 더없이 수려하고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전망대에서 귀여운 아이들이 긴장한 얼굴로 헬로, 포토, 플리즈 같은 영단어를 외치며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자고 부탁했다. 외국인을 보니 신기했나 보다. "하리 포토 에칵 가무(그래요 사진 한 장 찍읍시다)."라고 이 나라 사람들이 주로 쓰는 싱할라어로 대답했더니 깜짝 놀라며 자지러졌다. 그리고 아이들은 재잘재잘 이야기를 풀어냈다. 자기들은 케골 지역 '다함파살'에서 견학을 왔다고 했다.


다함파살은 일요일 어린이 불교 학교를 말한다. 쉽게 말해 어린이 법회다. 불자 학생들은 일요일이 되면 절에 가서 불교를 배울 수 있다. 다함파살에 가는 것은 선택사항이지만, 부모들은 자녀가 종교 활동을 통해 자비롭고 지혜로운 성인으로 성장하길 바라기 때문에 다함파살에 보내려고 한다.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종교는 단순한 믿음을 넘어, 삶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가 사람들의 일상에 깊숙이 스며있다.


계단을 내려오며 다함파살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들과 단체로 캔디 사찰 기행을 왔는데, 조금 전에는 불치사에 들렀다고 했다. 나는 이제 불치사에 갈 거라고 했더니, 어차피 그 근처를 지나가야 한다며 자신들이 타고 온 차에 타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비하라와칸더에서 내려갈 때는 운 좋게도 그들이 타고 온 단체 버스를 얻어 탔다. 내가 버스에서 내릴 때 사람들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곤 "부두 사러나이(부처님의 가피가 가득하세요)."라고 외쳤다. 나도 그들을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불치사(Sri Dalada Maligawa)는 부처님의 치아 사리를 보관하고 있는 불교식 궁전으로, 스리랑카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손꼽힌다. 내가 스리랑카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기도 하다. 불치사에 들어서면 마음이 저절로 평온해진다. 불치사는 하루 3번, 치아 사리함을 공개하는 의례 '떼와와'를 진행한다. 오전 5시 30분, 9시 30분, 오후 6시 30분에 진행하는데, 9시 30분 시간대가 가장 붐빈다. 하필 그 무렵에 방문했더니 입장하려는 사람들로 불치당 안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람들 틈에 휩쓸려가는데, 갑자기 그 사이에서 누군가 나를 끄집어냈다.


나를 구제해 준 사람은 뜻밖에도 예전에 말을 나눠본 적이 있는 불치사 직원이었다. 그는 내게 꼭 주고 싶은 선물이 있다며 자신의 주머니에서 하얀 실팔찌를 한 뭉치 꺼내 건넸다. '삐릿눌러'였다. 그건 스님들이 경전을 독송하며 축복의 기운을 넣은 스리랑카 불교 전통의 실팔찌다. 내가 오른쪽 손목에 삐릿눌러가 두 개나 있다고 보여주니, 자기가 주는 건 잘 챙겨놨다가 나중에 필요할 때 묶으라며 손바닥에 올려줬다. 감사한 마음에 그 자리에서 하나 묶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는 내게 "달라다 사미두 피히타이(치아 사리의 축복을 받으세요)."라고 축원의 말을 건넸다.


내 오른쪽 손목에는 삐릿눌러가 3개나 있다. 하나는 캔디가 고향인 스리랑카 스님이 한국에서, 다른 하나는 캔디 하숙집 아빠가, 마지막 하나는 오늘 불치사 직원이 나의 건강과 안전을 기원하며 묶어준 것이다. 실의 개수로 복을 따지는 건 무의미한 일이지만, 오늘만큼은 나의 행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 공연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캔디로 엮인 세 개의 실팔찌를 하나로 모아봤다. 축복의 힘이 느껴졌다. 삐릿눌러는 언젠가 색이 바래고 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 끈에 담긴 다정한 손길과 사람들이 모아준 행운은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 단단히 묶여 있을 것이다.


하숙집에 돌아가니 마히네 큰엄마가 놀러 와 있었다. 저녁에 아세니와 불치사에 갈 거라고 했다. 현지인 시선에서 불치사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서 나는 그들을 따라 또 불치사에 갔다. 큰엄마가 나의 캔디 살이를 응원한다며 불단에 올릴 꽃을 사주셨는데, 내가 꽃내음을 맡으며 "수원다이(향기롭다)."라고 중얼거리자 큰엄마는 깜짝 놀라며 공양물은 부처님께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즐겨선 안 된다고 일러주었다. 무심코 감각적 쾌락에 취해 부끄러웠지만 지금이라도 깨달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현지 불자들과 함께하니 사찰 예법을 제대로 익힐 수 있어 좋았다. 역시 문화는 살아 숨 쉬는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배워야 한다.


밤의 불치사는 낮의 불치사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빛을 머금어 영롱한 불치사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번 생에 이토록 달콤한 도시 캔디에서, 이토록 다정다감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벅찬 감동을 느꼈다. 나는 분명 전생부터 캔디와 인연이 있었으리라. 그러니 캔디는 먼 옛날부터 이어진 나의 고향이다.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아낌없이 타인의 복을 빌어준다. 나는 그저 스리랑카에 오기만 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나의 하루하루를 정성껏 축하해 준다. 이제는 고향이 캔디라고 자랑하는 사람보다는, 누군가에게 실팔찌 하나 정도는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타인을 축복하는 방법을 배우며, 나도 조금씩 캔디 사람이 되고 있다.


스리 마하 보디 위하라야(Sri Maha Bodhi Viharaya)
불치사(Sri Dalada Maliga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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