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세 번째 이동이다. 어쩌면 이탈일 수도 있다. 보편적인 길에서 빠져나온 거니까.
첫 번째 스리랑카는 학업을 중단하고 반년을 봉사했고, 두 번째 스리랑카는 취업을 미루고 일 년을 봉사했고, 세 번째 스리랑카는 직장을 그만두고 두 달 살이를 한다. 이번에 주어진 시간은 68일. 그중 절반은 하숙인으로 지내고, 절반은 수행자로 지낼 계획이다. 스리랑카에 갈 때마다 학업, 취업, 직업처럼 중요한 무언가를 내려놨는데, 그건 스리랑카를 선택한 결과였을 뿐이며, 현실을 회피하기 위한 꼼수는 아니었다. 매 순간 스리랑카라는 선택에 최선을 다했기에 그에 따른 결과 역시 수용했다.
사람들이 스리랑카에 또 가는 이유를 물으면 나는 매번 다른 답을 댔다. 친구를 만나려고, 봉사하려고, 여행하려고, 창업 준비하려고, 논문 연구하려고, 휴식이 필요해서 그리고 단기 출가하기 위해서. 그중 거짓은 하나도 없었다. 그걸 꼭 스리랑카에서 해야 하냐고 묻던 사람들의 우려도 충분히 이해한다. 해외봉사를 다녀와 동년배보다 직장 경력이 짧은데, 다른 이들이 자기 것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있을 때, 더 쌓으려고 노력하기는커녕 그나마 조금 올려놓은 것마저 내려놓고 다시 떠나는 게 옳은 결정인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모든 고민에 대한 답이 그 섬에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귀향하는 마음으로 비행을 준비했다. 6년 만의 스리랑카 방문이지만, 국내에서도 스리랑카 이주민 지원 활동을 해왔기 때문인지 두렵거나 낯설지는 않았다. 스리랑카 경력자다 보니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기에 짐을 싸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내가 쓸 생필품은 덜었고,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채웠다. 스리랑카 음식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국 식재료는 하나도 챙기지 않았고, 현지에서 생긴 병은 현지 방식으로 치료해야 한다는 주의라 비상약도 준비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의 약을 하나도 챙기지 않은 건 정말 큰 실수였다.
출발부터 탈이 나고 말았다. 최근 출국 준비로 무리했던 탓인지 공항으로 가는 내내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아침에 먹은 밥이 체한 걸 수도 있고, 늘 속을 썩이는 이석증이 재발한 걸 수도 있다. 설상가상 탑승 3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주 노동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스리랑카 사람들과 그들의 수많은 짐으로 인해 체크인 대기가 한참 길어 잠시 쉴 여유마저 없었다. 하염없이 수속을 기다리다가 구역감으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대기 줄이 줄어들 때마다 한두 걸음 걷다가 다시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정신을 부여잡고 간신히 비행기에 탑승했으나, 이륙과 동시에 복통이 더 심해졌다. 뱃속에서 경사라도 난 것처럼 온갖 내용물이 춤을 추었다. 좁은 공간에서 움직이기 답답했는지 꺼내달라고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결국 기내 화장실로 달려가 한국에서 먹은 음식을 모조리 토해냈다. 탑승 한 시간이 지나고 기내식이 나왔는데, 속이 울렁거려 사과 한 조각과 홍차 한 잔만 겨우 삼켰다. 그리고 금방 먹은 소량의 음식물마저 모두 게워냈다.
고통스러운 비행이었다. 멈출 수도 없고, 누울 수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8시간 동안 나 홀로 전쟁을 치렀다. 스리랑카에 돌아가기까지 6년이나 걸렸는데, 하늘에서의 8시간마저 순조롭지 않으니 서러워 울음이 터졌다. 뱃속에 든 것도 없고, 눈물까지 한바탕 배설했더니 기력이 빠졌다. 그런데 더 이상 몸에서 비울 게 없어지자 오히려 고통이 가벼워졌다. 그제야 멀미를 조금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시작부터 '버리고 떠나기'를 실천한 게 아닌가. 십몇 년 만의 구토로 아주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지만 이건 한국에서 힘들었던 기억을 모두 뱉어내고 스리랑카에서 좋은 추억을 새로 채우라는 뜻이 아닐까.
비행기는 스리랑카 네곰보 공항에 착륙했다. 나의 목적지는 캔디(Kandy). 한 달간 친구 마히네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캔디는 네곰보에서 차를 타고 세 시간 넘게 가야 하는 산간 지역이다. 평소 여행 계획을 꼼꼼하게 세우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이동 수단도 제대로 찾아보지 않고 무작정 스리랑카에 왔다. 스리랑카의 친절과 자비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어떻게든 잘 될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역시나 그 믿음은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아무런 대가 없이 친절히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버스를 타고 캔디에 무사히 도착했다.
마히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가족들은 늦은 시각까지 잠도 자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에서 현지 전화번호를 개통하자마자 마히에게 전화를 걸어 비행기 멀미가 심해서 저녁을 못 먹는다고 미리 얘기해 두었는데, 마히는 하루 종일 멀미하고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한 내가 걱정되었다며 마당에서 키운 라임으로 주스를 만들어 놨다. 라임이 복통에 실제로 효과가 있는진 모르겠으나, 마히가 건넨 라임 주스를 마셔보니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는 확실히 있었다.
그렇게 세 번째 스리랑카의 첫날밤이 저물었다. 스물아홉에 진리를 찾아 출가한 싯다르타처럼 이십 대의 끝자락에 선 나는 비장한 각오로 한국에서 너저분하게 얽힌 인연을 정리하고 스리랑카에 발을 디뎠다. 스리랑카는 언제나 내 인생의 궤도를 바꿔놓았으니 이번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이 여정의 방향이 어느 쪽이든 나는 기꺼이 내 몸을 던질 것이다.
스리랑카행은 하늘에서의 비행(飛行)일까, 섬에서의 비행(非行)일까. 처음 홀로 하는 비행은 쉽지 않았지만, 어쨌든 마음의 고향 스리랑카에 돌아왔다.
그리고 캔디에서의 하숙 생활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