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에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처음 그 섬에 들어간 건 2016년 여름이었다. 학부 시절, 스리랑카 캔디(Kandy)의 장애인 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봉사자로 머무르며 장애인의 직업 훈련과 사회 적응을 지원했다. 해외봉사라는 말은 거창했으나 실상은 사람들과 밥을 먹고, 떠들고, 웃으며 일상을 보내는 보통의 삶이었다. 봉사활동의 목적은 장애인의 재활이었는데, 나야말로 그곳에서 많은 사랑을 받아 상처를 회복하고 재활을 경험했다. 그해 그렇게 반년을 봉사하며 얻은 힘으로, 2018년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가 시민운동 활동가로 1년 더 봉사하고 왔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스리랑카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싶었다. 스리랑카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 이주민 집단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동료 봉사단원과 스리랑카를 위한 모임을 만들어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닌 지 벌써 5년이 됐다. 이주노동자의 통역을 돕다가 그들의 고용주에게 욕을 듣기도 하고, 부당한 외국인 고용제도에 분노하기도 했다. 나라를 도울 방법을 모색하고, 함께 경조사를 치르고, 때로는 여행을 떠나며 스리랑카와의 인연은 더욱 깊어졌지만 나는 점점 시들어갔다.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실망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들을 만날 때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약속은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이거늘 스리랑카 사람들에게는 어린아이처럼 새끼손가락 꼭꼭 걸고 시간을 지켜달라고 부탁해야만 했다. 설령 약속을 지키지 못해도 절대 화내지 않을 테니 못 올 것 같으면 미리 말해달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당부했건만 하나같이 약속 당일이 되면 연락이 끊어지고 며칠 뒤에 아무렇지 않게 등장해 속을 썩였다. 그들을 믿고 먼 길을 달려갔다가 바람맞고 허탈하게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과도한 헌신은 독이 되었다. 가끔은 나의 업무까지 미뤄가며 유학생의 과제를 도와주었고, 밤새 한국 정부에 제출할 행정 서류를 작성해 주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스리랑카 사람에게 스토킹 피해까지 겪으면서 몸과 마음이 무너져버렸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신체가 도는 것인가. 정신이 도는 것인가. 무언가 헛돌고 있었다. 별도 달도 없는 새까만 우주를 외로이 표류하는 기분이었다. 병원에서는 이석증이라고 했다.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전생에 악연이었던 걸까. 스리랑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머리를 밀고 싶다는 생각을 수십 번, 절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수백 번, 속세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수천 번 했던 것 같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의 존재부터 소멸에 이르는 길을 사성제라는 네 가지 단계로 제시하셨다. 인생이 괴로움이라는 첫 번째 진리는 절실히 와닿는다. 나는 지금 너무나도 괴로우니까. 이 정도로 고통받았으면 해탈할 법도 한데, 나는 여전히 사성제의 첫 문턱인 고(苦)에서 허덕이는 하찮은 중생에 불과하다. 도대체 이 고통의 원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답을 알고 싶었다. 살고 싶었다. 10일간 침묵하며 위빳사나 수행에 매달려 보기도 하고, 3개월 동안 매주 절에 가서 참선에 몰두해 보기도 하고, 마음을 닦겠다며 불교대학에 다녀보기도 하고, 6개월 동안 명상 수련에 매진해 지도자 자격을 취득하기도 했다. 하지만 법당 바닥에 방석을 깔고 결가부좌로 앉아 있어 봐도, 땀을 쏟아내며 108배를 해봐도, 책을 펴놓고 좋은 문장을 되뇌어봐도 번뇌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운명이라 믿었던 스리랑카는 시절인연이었던 것일까. 흩어져야 할 인연을 나 혼자 애써 붙들고 있던 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시작점으로 돌아가 확인하기로 했다. 나를 치유해 주었던 그곳에서, 엉켜버린 인연의 실을 풀거나 매듭을 짓고 올 것이다. 어쩌면 더 무너질 수도 있고 다시 일어설 수도 있다. 모든 가능성을 짊어지고 집을 떠나 섬으로 출항한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나의 세 번째 스리랑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