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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가족이 되었을까

by 미누리

마히네 가족과 여행을 가기로 한 날이다. 캔디에 살면서 웬만한 곳은 다 가본 나를 위해, 가족들은 외국인이 잘 모르는 숨은 명소에 데려가겠다고 입을 모아 호언장담했다. 그렇게 그들이 며칠을 심사숙고하여 고른 곳은 두누마덜라워 산림보호구역(Dunumadalawa Forest Reserve)이다. 고심의 흔적이 느껴졌다. 외국인은커녕 내국인도 쉽게 갈 수 없는 곳을 찾았으니 말이다. 거긴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이다.


전날 밤, 가족들은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차를 타고 멀리 이동해야 하니 아침 일찍 준비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성미 급한 한국인답게 아침 일찍 일어나 가장 먼저 준비를 마친 나와 달리, 가족들은 입을 옷도 고르지 못한 채 잠옷 차림으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약속한 출발 시간은 오전 9시였으나, 결국 11시가 되어서야 출발했다. 스리랑카의 느긋한 시간 개념은 역시나 어김없었다. 스리랑카에서는 이렇게 기다리는 시간도 여행의 일부다.


아빠는 하숙집을 지키는 것이 본인 몫이라며 동행하지 않았고, 둘째 남동생 말리떠가 아빠의 역할을 대신했다. 처음 봤을 때 교복을 입고 있던 말리떠는 어느덧 정장을 입고 출근하는 의젓한 회사원이 되었다. 고맙게도 회사에 휴가를 내고 우리의 여행을 책임졌다. 말리떠가 아빠의 뚝뚝(바퀴가 셋 달린 자동차)을 직접 운전했는데,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거침없이 산길을 달리는 모습이 어찌나 기특하고 대견하던지. 나는 뒷좌석에서 연신 "혼다이(잘한다)." "니여마이(멋지다)."를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펼쳐 그를 응원했다.


말리떠는 하루도 쉬지 않고 출근한다. 한 달 내내 일하는 것이다. 아침 7시에 집에서 나가 저녁 8시가 넘어서야 돌아온다. 공공기관에서 비정규직 사무원으로 일하는데, 신분이 불안정하다 보니 회사에서 지시하지 않아도 본인이 나서서 정규직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한다고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몇 년간 백수로 지내다 지인의 소개로 어렵사리 구한 직장이라, 일할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그런 그가 나를 위해 회사에 휴가를 내고 운전을 도맡아주니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말리떠는 얼굴 보기도 어려우니 당연히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이번 여행에서 말리떠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나 또한 비정규직으로 일한 적이 있기에 그가 회사에서 겪는 고초에 공감할 수 있었고, 가장 중요한 건 너의 건강이니 너무 무리하진 말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한편으로는 정규직 일자리를 자발적으로 그만두고 스리랑카에 온 나는 이들 눈에 얼마나 배부른 사람처럼 보일까 싶어 겸연쩍었다. 가진 것을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만큼 스리랑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두누마덜라워 산림보호구역은 캔디 시청이 직접 관리하는 숲이다. 환경 보호의 이유로 일반인 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됐지만, 아빠의 친척 중에 산림 부서에서 근무하는 분이 계셔서 그분을 통해 시청에 사전 허가를 받고 입장할 수 있었다. 인적이 없는 대신 온갖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주의해야 했다. 자연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조용히 걸으려고 애썼지만, 인기척을 완벽히 숨길 순 없었나 보다.


굶주린 거머리들이 인간 냄새를 맡고 흥분해 버렸다. 엄마가 거머리의 이름을 부르면 거머리가 알아듣고 찾아온다고 해서 '그 친구'라고 불렀음에도, 슬리퍼를 신고 있던 사람들은 그 친구에게 피를 보시해야 했다. 나는 운동화를 신고 있었는데, 거머리는 내 양말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피를 구걸했다. 씩씩한 아세니가 맨손으로 거머리를 떼서 땅에 내려줬다. 내가 거머리를 무서워하자, 아세니는 계속 내 곁에서 주위를 주시하며 나를 지켜주었다.


깊은 숲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나무 위에 지은 오두막 쉼터가 보였다. 사다리를 타고 그 위로 올라가 잠시 숨을 돌렸다. 캔디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역이라 자동차 매연이 바깥으로 퍼지지 못하고 안에 켜켜이 쌓인다. 특히 하숙집이 있는 캔디 시내는 스리랑카 내에서도 교통 체증이 심하기로 유명한 만큼 매연이 심각해 목이 금방 칼칼해진다. 숲에서는 자동차 경적이 들리지 않았고, 쉴 새 없이 뿜어대는 매연도 없어, 숨통이 트이면서 폐가 맑게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자연이 주는 치유의 힘은 실로 위대하다.


직원들의 휴게 공간인 평지의 한 오두막에서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펼쳐 먹었다. 엄마가 준비해 온 넉넉한 양을 보고, 가족들이 아침에 분주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각자의 밥과 찬이 신문지에 곱게 싸여있었고, 겉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렌틸콩을 부드럽게 끓인 카레와 생코코넛으로 만든 반찬을 요리해 왔는데, 고맙게도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 나를 위해 매운 양념을 뺀 반찬을 따로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엄마는 오늘 처음 본 숲의 직원들에게도 도시락을 나눠주었다.


원숭이도 엄마 밥이 탐났던 모양이다. 수십 마리나 되는 원숭이들이 오두막을 둘러싸더니 밥을 훔쳐먹을 기회를 살폈다. 어쩔 수 없이 조급하게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이른 아침부터 음식을 준비해 준 엄마의 정성에 보답하기 위해 걸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허겁지겁 밥을 해치운 나와 달리 마히는 동물에게 나눠주기 위해 일부러 밥을 남겼다. 그리고 담당 직원에게 허가를 받고, 남은 밥을 원숭이와 강가의 물고기에게 나눠주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일용할 양식을 동물에게 베푸는 게 습관이 되어 있다. 특히 이곳에서는 굶주린 동물을 위해 잔반을 만드는 게 예의 같았다.


다음으로 간 곳은 두누마덜라워 상수도 시설이었다. 캔디는 두누마덜라워 숲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물을 활용하기 때문에 다른 도시에 비해 물이 청정하다고 했다. 요 며칠 하숙집에서 물 한 모금 마시기도 조심스러웠다. 스리랑카 수돗물은 석회수라 외국인은 생수를 마시길 권장하는데, 하숙 생활을 하다 보니 혼자만 생수를 사다 먹기 눈치 보여 현지인과 똑같이 수돗물을 마시고 있다. 엄마는 물을 많이 마셔야 건강에 좋다며 매일 한 컵 이상 마시게 한다. 수질에 대한 우려 때문에 억지로 마시는 게 곤욕이었는데, 이제 안심하고 마셔야겠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소낙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내가 비에 젖을까 봐 걱정됐는지 계속 뒤를 돌아보며 나의 상태를 살폈다. 진심으로 내가 편안하길 바라는 그들의 자애로운 마음에서 우리가 정말 가족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는 어떻게 그들의 가족이 되었을까. 아빠의 책임감, 엄마의 세심함, 마히의 배려심, 말리떠의 성실함, 아세니의 다정함 그리고 동물에 대한 사랑과 자연에 대한 존중. 그런 소중한 마음이 모여 이방인인 나를 가족으로 품어줄 수 있던 게 아닐까.


스리랑카의 시간은 한국의 시간보다 느리게 흘러가지만, 그들의 속도에 맞춰 걷다 보면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조금씩 배울 수 있다. 하숙집 식구들과 오지의 숲속을 함께 걸었던 오늘 하루를 오래도록 추억하고 싶다. 그 기억은 앞으로 낯선 곳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갈 용기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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