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하숙집은 자연을 닮았다.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엄마가 정성스럽게 가꾼 마당 텃밭에는 라임, 고추, 토마토, 각종 향신료 등 먹을거리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주방에서 요리할 때마다 마당으로 나가 신선한 식재료를 따온다. 요리하고 남은 음식물은 천연 퇴비함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만들어진 퇴비는 다시 텃밭으로 돌아간다. 자연에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환을 경험한다.
마당에는 매일 다채로운 동물이 놀러 온다. 아침에는 작은 새가 찾아오고, 저녁에는 박쥐 부부가 날아든다. 그들이 편히 머물 수 있도록 응접실 천장에 쉼터를 만들어 주었다. 아침마다 찾아오는 다람쥐 손님에게는 전용 밥그릇에 밥을 주는데, 어쩌다 밥을 늦게 주는 날에는 다람쥐 손님이 염치없게 항의하듯 밥그릇을 두들긴다. 가끔은 옆집 강아지와 고양이도 놀러 온다. 모든 동물이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원숭이 무리는 하숙집 쓰레기와 빨랫거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에 내쫓김을 당한다. 반가운 손님이 되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배려와 책임도 함께 지녀야 함을 배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식탁에 앉아 하품하면 누군가 다가와 홍차 한 잔을 건넨다. 그 차에는 환대의 의미가 담겨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잠에서 깨고 서로 인사를 나눈다. 아침에는 주로 쌀밥과 카레를 먹는데, 식탁에는 수저가 없다. 찰기가 없어 흩날리는 밥과 수분 가득한 반찬을 오른손으로 뭉쳐 먹어야 풍부한 맛이 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뿐만 아니라 손을 이용한 촉각으로도 식감을 즐기는 것이다. 밥이 입에 들어가기 전에 손으로 온기를 느낄 수 있으니 입천장이 델 일도 없다. 손이 뜨거울 때는 후후 불면서 식혀 먹는 재미가 있다.
하숙집에서 엄마는 요리를, 아빠는 손님 응대를, 마히는 주로 객실 청소를 한다. 주인과 손님의 관계는 느슨한 편이라 가끔은 손님이 요리하거나 청소하기도 한다. 지적장애가 있는 마히에게 일을 시킬 때는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지시해야 하는데, 그 역할은 별채 2층 마담이 도맡았다. 특수교사였던 마담은 마히를 지도하는데 탁월하다. 마담은 마히를 가르치고, 마히는 나를 가르친다. 어느덧 나도 마히를 도와 하숙집 침대 덮개와 베갯잇을 교체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사람에서 다시 사람으로 돌고 도는 공생을 경험하고 있다.
엄마, 마담, 닐루 이모까지 쉰을 넘긴 여성이 세 명이나 살고 있는 우리 하숙집은 이야깃거리가 끊이질 않는다. 하숙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지만, 문이 없는 응접실에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식탁이 세 개나 있다. 하숙집 식구들은 낮에 각자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다, 저녁이 되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식탁에 모여 서로의 밑반찬을 나누고 도란도란 수다를 떤다. 다들 어찌나 목청이 좋은지 식탁에서 웃는 소리가 하숙집을 들썩여 방에 있던 사람들도 호기심을 못 참고 나온다. 오늘은 옆집에 사는 할머니와 손녀들 그리고 그들의 반려동물마저 놀러 와 평소보다 더 시끌벅적한 저녁이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은 없다. 식탁에 술이 오르지 않아도 대화가 무르익는다.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찻잔을 잡고 수다를 떨다 보면 나도 스리랑카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아무리 피곤해도 싱할라어를 배우기 위해 식탁 모임에 빠지지 않는다. 새로운 단어를 하나라도 더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다. 특히 마담은 나의 좋은 싱할라어 선생님이다. 그녀는 한평생 장애인을 가르쳤기 때문인지 언제나 타인에게 소소하게라도 도움을 주려고 하는데, 가장 큰 수혜자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외국인인 나일 것이다.
마담은 종종 내게 스리랑카 문화를 설명해 준다. 화장실에서 맨손으로 처리하는 법,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래, 전통 의상 입는 법, 스리랑카 음식 조리법, 가까운 약국의 위치처럼 스리랑카에 살면서 생애주기별로 필요한 다양한 정보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나 역시 궁금한 게 생기면 제일 먼저 마담을 찾는다. 마담은 다시 교단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 하지만, 아픈 남편의 병간호 때문에 침대 옆에 묶여있어야 한다. 하숙집에서 나에게 자신의 모국을 가르쳐주는 일을 통해 외로움을 극복하는 듯했다.
처음에는 마담의 친절이 직업병인 줄 알았다. 마담은 전직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강하다. 마담이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왜 특수교사를 직업으로 선택했는지, 장애인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마담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넘친다. 그게 직업병이 아닌 천성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늘도 나의 서툰 싱할라어 발음은 모두에게 깨알 웃음을 선사했다. 나는 ට(ta)와 ඩ(dha)처럼 혀를 굴리는 발음을 어려워하는데, 사람들은 일부러 내게 혀가 꼬이도록 어려운 단어를 알려주며 발음해 보라고 시켰다. 나는 똑같은 단어를 수십 번 반복하다가 항복을 외쳤다. 저녁마다 찾아오는 박쥐도 우리의 대화가 재미있는지, 그 풍경을 구경하듯 머리 위를 빙빙 돈다. 이렇게 매일 우리들의 식탁에서 활기찬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숙집은 하나의 작은 교실이다. 우리는 서로의 스승이 되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하고, 제자가 되기도 한다. 자급자족하는 텃밭, 동물과 공존하는 마당, 숟가락이 필요 없는 식탁, 술 없이 깊어지는 대화 속에서 상생하는 삶의 가치를 배운다. 오늘도 우리는 다 함께 찻잔을 들어 올린다. 따뜻한 홍차의 온기가 입안 가득 퍼지고, 이곳의 삶도 내 마음에 포근하게 스며든다.